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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사토 마사루의 최후 진술-와다하루키

일본 확대경

by DemosJKlee 2007. 10. 12.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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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마사루의 최후 진술

 

한겨레 | 기사입력 2004-11-22 19:21
[한겨레] 지난 10일 오전 10시, 나는 도쿄지법 법정의 방청석에 있었다. 전 외무성 분석1과의 주임분석관 사토 마사루에 대한 배임·위계 업무방해 재판의 마지막 변호인 변론을 듣고 있었다. 사토에 관한 글은 2002년 2월 이 칼럼에서 쓴 적이 있지만 독자들은 잊었을 것이다.
 

사토는 외무성에서 나와 솔직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예외적 인물이었다. 처음 만난 것은 1997년이었다. 그때 냉전시대의 대결 논리가 지배하던 영토 문제나 대러시아 외교를 대화로 풀어나가는 쪽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시작됐다. 외무성에서 그 선두에 선 사람이 도고 가즈히코 유럽국장이고, 사토는 그의 최측근이었다. 도고의 할아버지는 에이급 전범인 도조 히데키 내각의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지만, 그의 조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때 가고시마로 끌려온 조선인 도공이다.

 

도고와 사토 팀은 북방 4개섬 일괄 반환론의 틀 안에서 최대의 양보안인, 4개섬의 일본 귀속을 인정해주면 러시아가 언제까지 보유해도 무방하다는 내용의 ‘가와나 제안’을 추진했다. 두 사람은 끝까지 나에게 그 내용을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우익의 공격이 극심해 목숨을 걸었다고 털어놓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그 안을 거부하면, 다음은 2개섬 반환을 확실히 하고 2개섬은 교섭하는 단계론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런 정책 전환을 뒷받침한 정치인이 스즈키 무네오이며, 당시 총리와 긴밀한 연락·협의를 통해 추진했다. 정책 전환은 안된다는 압력단체와 그에 결탁한 정치인, 학자 등과의 힘겨루기는 끊임없이 계속됐다. 억지부리기도 동원돼 외무성 조직 내부에서 불만이 나온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들의 힘은 계기를 만나자 분출했다. 당시 다나카 마키코 외상의 임명은 최악의 인사였다. 다나카를 쫓아내는 데 성공한 외무성은 칼끝을 다른 쪽으로 돌려 다나카의 적으로 간주된 스즈키라는 외무성 비호인사를 축출하는 데로 나아갔다. 외무성에서 흘러나간 문서가 공산당에 들어가 기관지 〈아카하타〉에 보도되는 놀랄 만한 수법이 쓰였다. 공산당 의원이 (북방 4개섬 중 하나인) 구나시리섬에 지어진 옛 주민 숙박시설을 ‘무네오 하우스’라고 부르자, 이 말이 그해 최고의 유행어가 됐다. 스즈키 의원은 ‘거(대한) 악’, 사토는 ‘일본의 라스푸틴’으로 불렸다. 2002년 2월에 시작된 광란극은 6월14일 사토의 체포, 도고의 네덜란드 대사 해임과 유럽 망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스즈키는 의원직을 사직한 뒤 체포됐다. 러시아 외교를 맡아 2001년 모리 요시로 총리와 푸틴 대통령의 이르쿠츠크 공동성명을 일궈냈던 사람들이 이렇게 쓰러져 추방당했다.

 

사토는 도쿄구치소의 독방에 500일 이상 감금됐고, 재판이 시작됐지만 보석은 허용되지 않았다. 사토의 혐의는 두 가지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열린 러시아 관련 국제 심포지엄에 학자 3명과 외무성 직원을 참가시키고 이스라엘 학자를 일본에 초청하는 데 러시아지원위원회의 예산을 사용한 게 배임행위라는 것이다. 또 북방 2개섬의 디젤발전 공사를 미쓰이물산이 수주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줘 위계로 업무방해를 했다는 혐의가 적용됐다. 이 두 건에서 외무성 관리 1명이 더 체포됐고, 그의 발언이 사토를 유죄로 몰아넣었다.

 

사토는 예산 사용은 외무차관을 비롯해 상부의 승인을 얻은 것으로 위법성이 없으며, 미쓰이 건에선 위법한 정보제공을 지시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사토는 상사인 도고의 증언을 요청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대학에서 미국의 대학으로 옮긴 도고는 일본에 들어오면 체포당할 것이라는 협박을 받아 증언을 거절했다. 텔아비브 회의에 참석한 학자들 가운데 아무도 사토를 변호하지 않았다. 한 사람은 회의 뒤 모스크바로 가는 비용을 외무성에 요청해 받았으면서 그것은 개인 용도라고 말해 검찰의 혐의 적용을 돕기까지 했다.

 

변호사의 긴 변론이 오후 4시께 끝난 뒤 사토가 마침내 최후진술을 했다. 그는 “양심에 비춰 죄를 지은 게 없다”고 말을 꺼냈다. 이어 그는 △스즈키에 대한 고발과 단죄의 의미는 일본 정치를 배외주의적 내셔널리즘의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언론이 일방적인 의혹보도를 퍼붓고 열광적으로 ‘미디어 스크럼’을 짜 사람들이 선동에 조작당하기 쉽게 됐다 △외무성 현 집행부는 스즈키의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 변호하고 방어해줘야 할 직원을 범죄자로 추방하는 것을 도왔다고 진술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번 수사가 일본 외교에 실질적인 해를 끼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것은 중요한 지적이다.

 

“당시 내각 총리대신과 외무성 간부의 명령에 따라 조직의 명시적 결재를 받아 이행했고, 그때는 총리실과 외무성이 평가했던 업무가 2년 뒤에는 범죄로 적발당하는 상황이 받아들여지면 조금이라도 위험이 있는 일은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국제정치의 전문가로서 좋은 방안을 생각해내더라도 누구도 입 밖에 내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조직에는 일을 벌이지 않는 체질이 만연하게 된다. 부작위에 의한 국익 손실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사토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은 외무성 문서가 공개되는 26년 뒤면 분명해질 것이라고 덧붙였지만, 그 말이 나를 슬프게 했다. 노인은 그때까지 살 수가 없다. 괴로운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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