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족주의의 부흥의 위험성 - 김동춘<시사저널> 1995년 6월호
<시사저널> 1995년 6월호
신민족주의의 부흥의 위험성
김 동 춘(서울대학교지역종합연구소,사회학)
1.
우리는 통상 민족주의는 뭔가 긍정적이고 본받을만한 가치이자 사상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비록 현실정치의 무대에서는 실패했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온갖 비난과 위협을 무릅쓰고 남북협상에 나섰던 김구와 김규식의 민족정신에 대해서 높이 추앙하고 있다. 그리고 평생을 '민족'이라는 개념을 붙들고 싸우다가 사라져간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존경하고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에게 '매국노'라는 비난만큼이나 상대방을 형편없이 비하하는 언사는 찾기 어려웠고, 그 반대로 '애국자'라는 말처럼 사람들의 가슴을 뿌듯하고 훈훈하게 해주는 칭찬의 언사도 없을 것이다. 민족, 혹은 민족주의를 이렇게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데 익숙한 한국인들은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민족을 상당히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의 근현대사를 전세계 역사의 맥락에서 따져보면 왜 우리가 그렇게 민족, 민족주의를 좋게 해석해왔으며, 우리의 그러한 해석에 대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상하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다. 서구인들 특히 파시즘의 쓰라린 경험을 가진 유럽인들은 민족주의는 극우보수주의, 인종주의, 복고주의, 권위주의 등 부정적인 이미지와 일치시키고 있다. 지난 1992년 독일은 '민족주의전선'(NE)라는 신나찌 조직을 불법화시켰다. 이에 대해 독일당국은 '국우세력의 선동과 폭력에 대한 확실하고도 강력한 경고'라고 못박았다. 즉 여기서 우리는 간단한 공식을 얻을 수 있다. 민족의 차별과 학대에 저항하는 민족주의는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내용을 가질 수 있지만, 자기민족의 우월성과 순수성 및 타민족의 열등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는 타민족과 인종을 억압.멸시하고 복속시키려는 퇴영적 내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유럽의 민족국가가 성립되던 당시부터 드러났던 민족주의의 고전적인 공식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민족주의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그것은 중국과 북한에서처럼 때로는 사회주의적인 내용을 지니기도 하고, 때로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처럼 극우파시즘적인 내용을 지니기도 한다. 문제는 그 민족주의의 내용을 누가, 어떤세력이 무슨 목적으로 채우는가 하는데 있는 것이다.
2.
우리민족은 한번도 이웃민족을 침략하여 못살게 군적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이웃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 속에서 온갖 민족적 수난을 당해왔다. 따라서 우리는 민족적 억압과 멸시의 체험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억울한 일을 수 없이 많이 겪어왔다. 북한이 '촌스럽게 보일정도로' 반제국주의, 민족적 자존심, 애국주의를 강하게 내세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민족이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당해왔던 서러움을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다른 방식으로 민족을 극단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만큼 지금까지 우리에게 민족주의는 침략과 공격의 논리가 아니라 방어와 자기보존의 튼튼한 바위덩어리였다.
그런데, 단군이래 처음으로 우리는 이제 외국으로 진출하여 타민족을 경제적으로 고용하는 위치에 들어서게 되었다. 우리의 경제력은 아직 우리보다 못사는 인근 아시아 여러나라를 지배할 수준에 있지는 않지만, 지난 30년간 우리가 피땀흘려 노력하고 일구어 낸 결과 중위의 자본주의 국가로 올라섰다. 이제 우리나라 기술자와 관리자들 중 일부는 중국과 동남아에 가서 과거 일본의 관리들이 우리들에게 했던 방식대로, 목에 힘주면서 그들 나라의 종업원을 하인취급하고, 또 거들먹거리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에 가서 발해.고구려 시대의 우리영토인 만주일대를 되찾아야 한다(고토회복)고 외치며 다니고 있다.
그러나 가장 주목할만한 현상은 우리의 젊은이들이 이제는 "일본에서 배우자"는 기성인들의 태도를 비웃으면서 "남북한이 힘을 합쳐 일본을 꼼짝 못하게 하자"는 논리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해 독서계를 강타한 한일관계 관련 소설이나 에세이들은 바로 유래없는 '일본특수'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우리 민족이 남으로 부터 업신여심을 당하면서 갖게 되는 투쟁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이제 남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주면서 뽐내는 정서가 생긴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국력이 그만큼 성장한 덕택이라고 보아, 그냥 흐뭇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탈냉전 이후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세계 각지역에서의 새로운 민족주의적 징후들이 그러하듯이, 우리사회에서 솔솔 불고 있는 때아닌 민족주의의 부흥 역시 우리사회의 장래를 위해 별로 건강하고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 한다. 그것은 '민족'을 내세우는 것이 결코 '민족전체'의 이익에도 또 그것을 구성하는 대다수의 서민대중들의 이익에도 기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때문이다.
3.
80년대 후반이후 발흥하는 범세계적인 민족주의의 움직임은 세계체제의 변화의 산물이며, 세계화(globalization)의 일부이자 동전의 다른 면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세계화 과정에서 발흥하는 인종갈등, 민족분쟁, 분리독립의 움직임들은 전통적인 제국주의(침략주의)-민족저항운동의 틀로서 설명할 수도 없고, 헌팅턴 식의 '문명충돌'의 과정으로 볼 수도 없다는데 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즉 현재와 같은 신민족주의의 움직임은 19세기나 20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민족주의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냉전체제의 붕괴와 체제 간 대결과 그 이념적 기반의 붕괴로 이념의 갈등 속에 가리워졌던 잠복해있던 소수민족의 독립의 움직임과 그 과정에서 다른 민족과의 갈등, 마찰현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편으로는 경제의 세계화 과정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되는 민족들간이 희소자원의 분배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발흥하는 민족주의는 러시아의 극우세력의 민족주의를 제외하고는 세계시장을 두고서 다투는 선진자본주의 국가와 다국적 기업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러한 거대세력의 싸움의 틈바구니에서 생존과 자주독립을 도모하려는 약자들의 몸부림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세계질서의 경제적.정치적 힘의 역학관계가 여전히 뷸균등하다는 사실이 민족주의를 촉발시키는 가장 일차적인 기반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화 질서 속에서 경쟁력있는 국가,집단, 기업, 개인은 끊임없이 자신의 활동범위를 확대할 수 있고, 그 댓가로 무한대의 부를 축적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국가, 기업, 집단, 개인은 참담한 상태로 몰락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인종적 민족적 갈등은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약자의 몸부림이며, 이념대결 구도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집단과 민족 간의 오랜 원한이 '고삐풀린 채'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신흥민족주의는 보스니아 사태에서 볼 수 있었듯이 적대와 전쟁의 씨앗이 되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고통에 빠트리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으며, 인류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세계화의 화려한 구호가 지역간 불균등 발전을 촉진시킨다면 이러한 형태의 민족주의는 더욱 더 촉발되어 인류를 고통에 빠트릴 것이다.
4.
그러나 '민족'을 위한다는 이 범세계적인 '민족주의'의 논리는 불행히도 결국 흘러간 유행가의 가사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서적 만족감을 줄 수는 있으나 민족의 번영과 복리를 가져다주지 못할 가능성이 크고, 실제로는 힘없는 사람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권력자들의 기득권을 연장시켜 줄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족국가를 세우고 민족적 위신을 세우는 것이 결코 각 민족이나 집단, 개인의 최종의 목표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더 평화롭고, 행복하고, 민주화된 사회에 사는 것이다. 민족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하나의, 가장 중요한 경로, 방법, 조직체계일 따름인 것이다. 자본이 아무리 전세계를 자유롭게 이동하는 세계가 된다고 하더라고 국경은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고, 삶의 단위로서 민족의 의미는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어떤 민족, 어떤 국가, 어떤 사회인가 하는 점이다. 민족을 내세우가다 전쟁으로 발전하고, 그것이 많은 민족구성원을 고통스럽게 만든다면, 그것은 잘못된 출발일 수 밖에 없다. 민족적 갈등을 명분으로 하여 국내의 민주적 절차를 폐지시키고, 강압적으로 국민들을 동원하고 통제하는 것은 잘못된 출발이다. 내 민족을 잘살게 하기 위해 타민족을 억압하고, 멸시하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출발일 수밖에 없다.
힘있는 자의 민족주의는 언제나 국내적으로는 비민주성과 힘없는 자에 대한 억압을, 국외적으로는 힘없는 민족전체에 대한 정복을 수반하였다. 독일이 그러했고, 일본이 그러했다. 따라서 힘있는 나라에서의 민족주의는 언제나 국내의 비민주성과 비이성의 산물이었다. 지배세력의 광기를 민중들이 억제하기는 커녕, 그들의 선동에 동원되었을 때, 야만스러운 침략주의가 발흥하였다. 아렌트(Arendt)는 영국의 통치가 자혜적이었던 것은 이들이 제국주의적 통치를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영국의회와 영국의 여론에 의해 견제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바 있다. 침략적 민족주의에 대한 이러한 지적은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지금도 타당하다. 식민지 침략에 대해 반성하지 못하는 일본 극우세력의 퇴영적 민족주의는 그들의 사상체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사회의 비민주성, 일본국민의 낮은 권리의식에 기인하는 것이다.
필자가 우리사회의 민족주의의 기운들을 걱정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선 그것은 진정한 민족이익에 기여할지 의문이다. 동아시아는 세계의 어느 지역보다도 민족적 정체성이 강한 국가들이 인접해 있고, 역사적으로 사이가 매우 좋지 않다. 이들간에 서로 화해, 협력하지 않는다면 서로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미치게 된다. 중국과 일본의 군비강화는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우리가 탈냉전의 무드에 역행하는 추세에 민족주의로 맞선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선 일본과 대등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 정부차원에서 명확한 책임추궁 작업이 있어야 할 것이며, 군비경쟁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지역 갈등조정체제를 서둘러 만드는 것이 모두가 패배할 싸움에 말려드는 것 보다 더욱 지혜로운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중국에 가서 앞뒤 생각하지 않고 "만주땅은 우리땅"이라고 외치는 것은 애국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심기를 건드려 사실은 연변의 동포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이고, 중국의 긴장시키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외국에 진출한 기업의 관리자들이 약소민족의 종업원을 멸시하는 것은 방치하게 되면 국제적으로는 국위를 추락시키고, 국내적으로는 과거의 억압적인 노무관리를 지탱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위험스러운 사실이 있다. 이러한 퇴영적 민족주의를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을 경우, 국내의 민주화와 사회개혁의 요구를 국가경쟁력 강화, 민족발전 등의 이름으로 계속 덮어두려 할 것이고, 만약 남북간에 교류가 활발해 진다면, 못사는 이북의 동포들을 이등국민화 하여 민족 내의 깊은 마음의 분단을 지속시킬 위험성이 있다는 점이다.
분단의 고통 속에 있는 우리는 여전히 민족주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낡아빠진 약육상식의 민족논리, 단순한 저항의 민족논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겉으로는 민족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실제로는 민족의 대다수의 구성원의 복리에 기여하는 성숙하고 개방된 민족주의여야 한다.
그것은 민족적 흥분이 이성과 앎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는 진정한 민족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아무런 지적인 정신적인 무기를 갖지 못하고 있다. 무기없는 용사의 위협이나 허풍에 대해서는 아무도 겁내지 않는다. "일본은 없다"고 흥분하거나 좋아하지 말고, 우리가 얼마나 일본을 모르고 있는지에 대해 먼저 반성하고 일본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이들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