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의 사회과학

역사기술과 정치적 중립/다카하시 데쓰야, 최근 한국의 새역사교과서 논란

DemosJKlee 2008. 4. 5. 01:06

- [세계의창] 역사 기술과 정치적 중립 / 다카하시 데쓰야

- [제주 4·3사건 60주년] 뉴라이트 교과서의 반란

 

 

 

[세계의창] 역사 기술과 정치적 중립 / 다카하시 데쓰야

 

 

세계의창(한겨레)기사등록 : 2007-10-28

» 다카하시 데쓰야/도쿄대 교수·철학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전투에서 발생한 주민의 ‘집단자결’ 문제는 지난 4월 칼럼에서 다룬 적이 있다. 문부과학성이 검정을 통해, 일본군이 집단자결을 강제했다는 교과서 기술을 삭제해 말썽을 빚어왔다. 이번에는 그 후일담부터 써보겠다.
 

오키나와에서는 학회의 통설이나 생존자들의 여러 증언들을 무시한 정부의 ‘역사 개악’에 대해 격렬한 항의의 물결이 일어났다. 오키나와현의 전 시·마을 의회가 검정 결과의 철회와 일본군의 관여를 나타내는 기술의 부활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현의회에서도 여야의 차이를 넘어 초당파적 철회 요구 결의가 두 번에 걸쳐 이뤄졌다. 그래도 정부가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않자 오키나와에서 9월29일 현민 총궐기 집회가 열렸다. 대회는 11만6천명이 참가해 대성공을 거둔 채 끝났다.

 

한국에서는 대규모 시민집회가 드물지 않을지 모르지만, 일본에서 10만명이 넘는 시민집회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오키나와에서도 1995년 미군 병사의 소녀 성폭행 사건에 항의해 열린 현민대회에 8만5천명이 결집한 이후 최대 규모라고 한다. 오키나와 전투의 주민 피해에 대한 군의 책임, 국가의 책임을 은폐하려는 정부에 대한 분노가 오키나와 사람들 사이에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내가 지금 걱정하는 것은 검정 결과의 철회나 관련 기술의 부활에 반대하는 세력의 움직임이다. 이 세력에 속하는 여야 의원이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 그룹은 “역사에 정치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교과서의 기술도, 그것에 대한 문부성의 검정도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뤄져야 하며, 오키나와에서 항의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해서 정치적인 결정으로 검정 결과를 철회하거나 관련 기술을 부활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정치적인 역학관계로 역사가 얼마든지 바뀌어 기록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얼핏 간단히 반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까탈스런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검정 결과의 철회나 기술의 부활에 반대하는 쪽은 문부성 검정이 마치 정치적으로 중립인 듯이 말하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문부성의 검정은 그 자체가 역사학계의 통설이나 체험자들의 증언을 고의로 무시한 것이다. 전임 아베 신조 정권의 뜻에 따른 내용을 강요하는, 강한 정치성을 띠고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검정 결과의 철회와 원래 기술의 부활은 최초의 검정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왜곡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조처 이상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회나 지방의회의 결의, 시민집회의 힘이 정치를 움직여 교과서의 기술을 바꾸는 것을 무조건 인정해도 좋은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그렇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새역모의 교과서를 채택해야 한다는 결의를 국회나 지방의회가 차례로 진행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시민집회가 각지에서 다수의 참가자를 끌어모으는 사태를 상상해 보자. 그런 교과서 채택을 정치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6월 <아에프페>(AFP) 통신을 통해 발표된 ‘일본의 문화인 선언’에서는, 새역모에 가까운 역사관을 가진 일본인들이 역사인식에 대한 국가의 개입에 반대해 ‘금기 없는 역사연구의 자유’를 호소하고 있다. 현대의 역사수정주의가 까탈스러운 것은 정치적 중립과 언론의 자유, 학문의 자유의 옹호자인 듯한 얼굴을 하고 찾아오기 때문인 것이다.

 

 

 

[제주 4·3사건 60주년] 뉴라이트 교과서의 반란


제주 4·3 사건을 ‘좌파 세력의 반란’으로 규정한 <대안교과서> 출간

 

▣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한겨레21] 2008년04월03일 제704호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포럼이 출간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이하 대안교과서)가 제주를 분노로 들끓게 하고 있다. 4·3 사건을 ‘좌파 세력의 반란’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대안교과서>는 144~145쪽에서 제주 4·3 사건을 ‘좌파 세력의 반란’으로 규정한다.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 정치 세력이 대학민국의 성립에 저항했으며 이들이 1948년 4월3일에 제주도에서 무장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또한 이 사건은 “김일성의 ‘국토완정론’(남한을 미국 지배에서 해방시켜 국토를 완정하겠다는 이론) 노선에 따라 일어난 것”이며 “이같은 무장반란과 사회 각층에 광범히 침투한 좌파 정치 세력에 대처하고자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구닥다리 ‘4·3 폭동론’ 그대로 들고와”


이에 제주 4·3연구소는 “지금까지 많은 자료 분석이 있었지만 김일성은 물론 남로당 중앙당이 4·3 사건에 개입한 근거조차 제시되지 않고 있다”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발발한 사건이 ‘반란’이라면 그것은 누구를 대상으로 한 ‘반란’이냐”고 따져물었다.

 

역사적 시점의 혼돈도 지적됐다. 산간지대 초토화 작전은 정부 수립 이후 감행돼 당시 군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에게 1차 책임이 있는데도 <대안교과서>가 오로지 미군정청만 언급한 데 대해, 4·3연구소는 “뉴라이트가 대한민국 건국자·수호자로 미화하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흠집을 남기지 않으려는 의도”라고 평가했다. 또 “북한 정권이 세워지기도 전에 일어난 4·3 사건이 어떻게 김일성 정권 수립 이후에 나온 ‘국토완정론’의 노선을 따랐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대안교과서>의 책임편집을 맡은 이영훈 교수는 <한겨레21>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4·3 사건을 남로당이 주도했다는 것은 자료가 다 있으나 그걸 일일이 말할 순 없지 않느냐”며 “나는 경제사 전문가고 전공자가 아니니 세세한 부분은 말할 처지가 못 된다”고 했다. 또 “제주 4·3연구회가 낸 성명서는 읽어보았으나 아직 그에 대해 구체적인 의견은 없다”고 말했다. 교과서 집필자 12명 중 역사 전공자가 한 명도 없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역사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냐, 그런 말 하지 마라”고 답했다. 다만 “앞으로 토론이 일어나고 비판이 있으면 바꿔나갈 것이니 기다려달라”고 덧붙였다.

 

4·3연구소 박찬식 소장은 “보수우익 세력이 정권교체기를 틈타 구닥다리 ‘4·3 폭동론’을 그대로 들고 나와, 특별법이 제정되고 대통령이 공식 사과까지 한 4·3 사건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대안교과서>를 폐기하고 4·3 영령 앞에 사죄하지 않으면 제주도민과 4·3 유족의 엄청난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각 정당의 비난 성명도 잇따르는 가운데, 성명을 내지 않은 한나라당 제주도당의 대변인조차 “교과서 내용이 한쪽에 치우쳤다. 진상 규명이 진행 중인 사건을 전문가도 없이 이념의 잣대로만 재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안교과서 막아달라’ 인터넷도 후끈


분노는 인터넷을 타고 제주를 넘어섰다. 누리꾼들은 포털 사이트인 다음 아고라 게시판에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좀 막아주세요’란 제목의 청원을 올렸다. 1만 명 서명을 목표로 3월25일에 올라온 이 청원에는 하루 만에 4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같은 날 ‘뉴라이트 교과서를 정식 교과서로’란 청원도 올라왔지만 200여 명이 서명했을 뿐이다. 제주의 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앞으로 제주 지역 단체들이 <대안교과서> 사건을 쟁점화해나갈 것이고 조만간 유족들도 문제 제기를 할 것”이라고 전했다. 60년 세월이 지났건만 4·3은 여전히 피투성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