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확대경

요시미 슌야<왜 다시 친미냐 반미냐: 전후 일본의 정치적 무의식>중, 기지의 거리 유행의 거리

DemosJKlee 2012. 6. 23. 08:12

 

기지의 거리에서 유행의 거리로

(pp. 150-161)

 

<록본기>

 

(태평양 전쟁) 전전 까지 록본기 주변은 1878년 다케시바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황거 앞과 마루노우치에 있던 병영과 사단이 아자부, 록본기 지구로 이동한 이래로 육군의 보병 제1연대와 제3연대, 헌병대 본부, 근위보벼연대, 육군대학교 등이 집중적으로 들어선 '군인의 거리'로 발전해왔다. 거리에는 원래 군 관련 가게가 많았고 아침저녁으로 병영에서 울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쟁 말기 도쿄대공습으로 거리는 파멸적인 타격을 받아 전후를 맞이한다.

 

이윽고 구일본군의 시설 대부분이 미군에게 접수되어 근위보병연대의 시설은 미 육군 제1사단 사령부(현재의 TBS방송국), 육군의 연대시설들은 하디발락스라 불리는 미군 병사들의 숙사(현재의 신국립미술관)로 바뀌었다.

 

더불어 록본기와 히로우 일대에는 수많은 주택이 미군 관계자들을 위해 접수되면서 장교들의 주거지 주변에 그들의 '온리'도 살기 시작한다. 미군시설 대부분은 1960년경이 되어서야 반환되었기 때문에 전후 상당기간 미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무렵 미군을 상대로 한 클럽, 바, 레스토랑 등이 잇따라 개점되어 도쿄 도심에 있으면서도 훗사나 요코스카, 코자 등과 비슷한 분위기를 오래도록 남기는 거리로 변모하게 된다.

 

또한, 록본기 지역에는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록본기족'이라 불리는 젊은이들이 모여들게 된다. 이윽고 록본기에는 연예계와 방송구 관계자들이 모여들면서 클럽이나 바 등의 분위기를 바꿔 현재와 같은 화려하고 이국적인 다국적 밤거리라는 이미지가 만들어 진다.

 

1960년 전후 록본기는 미군 점령기의 기억을 은폐하면서 상품가치를 바꾸어 고객의 중심을 점령군 병사들에서 텔레비전 관계자들로 이동했다. 록본기는 점령군의 동네에서 미디어가 연출하는 유행을 경쟁하듯 받아들이는 젊은이들의 거리로 탈바꿈한다. 히비야선의 개통으로 이러한 대중화는 박차를 가하게 되고 1970년대에는 디스코 문화가 불어닥치게 된다. 

 

 

<하라주쿠>

 

하라주쿠의 경우도 미군장교용 대규모 시설이 있었던 워싱터 히이츠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원래 메이지 신궁에 인접한 요요기연병장을 전후에 미군이 접수하면서 하이츠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주위에는 병사들의 숙사가 들어서고 암시장도 성행했다. 역시 하사관 가족용 주택단지, 병원, 학교, 소방서, 교회, 백화점, 극장, 테니스코트, 골프장 등이 완비되면서 '풍요로운 미국'이 도쿄 중심부에 출현하게 된 것이다. 전전 신궁과 연병장이라는 이미지가 완전히 바뀌에 된 것이다.

 

1950년대 키디랜드와 오리엔탈 바자르 등 장교 가족용 가게들이 들어서고 이러한 거리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건물인 센터럴 아파트가 건설된다. 센터럴 아파트는 당시에는 도쿄에서 가장 호화로운 아파트였다.

 

하라주쿠가 점령군의 거리에서 패션의 거리로 이행하는 과정은 센터럴 아파트를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오모테산도와 메이지도오리 교차로일각, 워싱턴하이츠의 거의 정면에 지상7층, 지하1층의 고급맨션아파트인 센터럴 아파트가 건설된 것은 1958년이었다. 하이츠가 반환되자 미군측의 수요가 줄어 들었고,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 사진작가 등이 스튜디오를 만들기도 했다. 잡지사의 편집실이 자리를 잡기도 했다. 센터럴 아파트가 전후 초창기의 일본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라주쿠는 시끌벅적한 언더그라운드의 거점 신주쿠, 대형 광고대행사들이 밀집하게 되는 긴자와는 또다른 '외국냄새가 나면서도 조용한 거리'로 수용되게 된다.

 

록본기에서 기지의 거리가 연예계나 음악세계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변용을 했다면 하라주쿠의 변용을 매개로 한 것은 크리에이티브한 업계에 종사하는 이들과 그 관계자들의 연결고리였다.

 

 

<긴자>

 

긴자는 전쟁전부터 아메리칸 풍경과 결부되어 있었지만 점령기 긴자의 미국화는 훨씬 더 직접적인 미국 조계화였다. 점령기의 긴자는 "주요한 빌딩이 주둔군 시설로 접수됐고, 한큐 빌딩, 와코우, 구로자와빌딩, 마쓰야 등이 PX, 숙사 등으로 바뀌면서 일대에는 성조기가 나부끼고 있어 마치 미국의 거리 같은 인상을 주었다. 긴자 마쓰야의 PX에는 미 육군, 공군, 해군 그리고 마린이라 불린 해병대, 그밖의 연합군 장병들이 출입하고 있어서 엄청나게 활기찼고, 입구에는 전쟁고아들이 무리지어 물건을 팔거나 구도를 닦는 슈샤인보이들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당시에 미국은 긴자 거리에 미국식 이름을 붙였다. 지역 전체가 식민지적인 풍경으로 탈바꿈했다. 뉴브로드웨이, X애버뉴, 엠버시 스트리트, 센터피터스 애버뉴, 포커 스트리트, 홀드업 애버뉴 등이 명칭이 붙었다. 물론, 거리에 미국식 명칭이 붙은 것은 긴자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연예계>

 

와타나베 프로덕셔이나 호리프로 등 기지의 흥행 중개업자들 일부가 방송업계에 연결되고 레코드 산업 발전과 맞물려서 전후 가요세계를 형성한다. 몇년전까지 기지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자라고 있던 점령자와 예능인들의 관계가 이때부터 텔레비전이나 레코드, 라디오 등 미디어를 통해 전후 일본인의 일상공간 속에 일거에 넘쳐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