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이 키운 동북아 영토갈등/동북아영토분쟁의 ‘숨은 손’ 미국
미-중이 키운 동북아 영토갈등…한국은 ‘좌충우돌’
등록 : 2012.08.16 19:24 수정 : 2012.08.17 10:28
동아시아 영토분쟁 확산
중 성장 맞선 미 봉쇄정책
‘G2 힘겨루기’가 근본 원인
미·일과 동맹 ‘올인’ MB정부
독도 방문 뒤 분쟁화 휩싸여
2차대전 종전 기념일인 지난 15일, 동중국해의 절해고도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는 두 나라의 국기가 꽂혔다. 중국의 오성홍기와 대만의 청천백일만지홍기. 이 섬을 실효지배하는 일본 순시선의 저지를 뚫고 상륙한 홍콩과 마카오 시민들의 손에 들린 국기들은 국기는 동아시아에 이는 파고의 성격을 뚜렷이 보여줬다.
이른바 ‘그레이트 차이나’ 혹은 ‘대중화’(大中華)라고 표현되는 중국의 세력 팽창 움직임이다. 센카쿠에 휘날린 두 나라의 국기는 중국과 대만이 공식적인 적성관계와 관계없이 외부의 대응에서는 ‘하나의 중국’ 또는 대중화권을 형성하고 있다는 상징처럼 읽힌다.
하지만 겉으로 공세적으로 보이는 센카쿠열도에 대한 중국의 움직임은 실제로는 방어적이라 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 형성되는 미국 주도의 중국 봉쇄에 대한 대응이기 때문이다. 이 섬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의 공세적 대응은 중국이 스프래틀리군도, 파라셀제도 등 남중국해 전역에서 동남아 나라들과 벌이는 영유권 분쟁과 맞물려 있다. 특히 지난 2년간 이들 동아시아 해역의 영토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결정적이다.
미국은 2010년 7월 아세안지역포럼(ARF)에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남중국해 분쟁의 평화적 해결이 미국 국익과 직결된다”는 발언을 계기로 개입을 시작했다. 사실상 동남아 국가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지난해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미국의 아시아 귀환’을 천명했다. 아·태 지역으로 미국 군사력의 비중을 높이는 조처를 잇따라 취했다. 필리핀 수비크만 해군기지의 재사용, 오스트레일리아 다윈기지로 상주병력 파견에 이어 베트남 깜라인만(캄란만) 기지의 사용 여부도 타진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 주변국들을 엮어서 전방위적으로 중국을 봉쇄·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 미국 국무부는 센카쿠열도도 미-일 방위조약의 대상이라고 밝혔다. 이 섬에서 무력분쟁이 벌어지면 미국이 개입하겠다는 뜻이다. 일본 정부는 개인 소유인 이 섬의 국유화를 내비치기도 했다. 동아시아 영토분쟁에서 방어적 처지로 몰리던 중국은 이 섬을 약한 고리로 보고 역공에 나섰다.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지배가 청일전쟁의 결과물이라는 과거사가 있는데다, 중국 봉쇄의 주축인 미-일 동맹을 공격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올해 상반기 내내 중국 쪽은 센카쿠열도 해역에 순시선을 파견하며 일본과 충돌을 야기했고, 결국 중국인들의 섬 상륙으로까지 치달았다.
중국이 주변국들과 갈등을 보이는 사이 미국은 이 지역에서 외교·군사적 보폭을 넓혔다. 일본 민주당 정권이 추진하던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의 현외 이전을 무효화해 미-일 동맹을 강화했다. 필리핀, 베트남 등과도 외교·군사적 관계를 확장했다. 중국 외교의 독점 대상이던 미얀마와도 관계 정상화에 나섰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동북아 영토분쟁의 ‘숨은 손’은 미국
등록 : 2012.08.20 19:11 수정 : 2012.08.20 21:02
국제협정서 센카쿠 등 불씨 남겨
영향력 극대화 위한 전략 취해와
독도에 대해선 중도적 태도 뚜렷
동북아 영토분쟁의 숨은 주인공은 미국이다. 특히 중국과 일본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와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북방 4개 섬의 경우,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에 영토분쟁이라는 ‘갈등의 불씨’를 남겨놔 영향력을 극대화하려 했다는 주장이 관련 문서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꾸준히 제기돼왔다.
역사적인 논쟁은 별개로, 센카쿠열도의 섬들은 1951년 9월 체결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3조를 통해 미국의 신탁통치를 받게 된 오키나와의 일부로 간주돼 미국의 시정권 아래 놓이게 된다. 열도를 이루는 섬 다섯 개 가운데 구바시마와 다이쇼토는 지금도 미군의 폭격장으로 공여돼 있어, 섬에 들어가려면 미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미국은 1972년 5월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며 센카쿠열도의 귀속처를 명확히 규정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일본 외교사 전문가인 도요시타 나라히코 간사이가쿠인대학 교수는 “닉슨 대통령은 미-중 데탕트를 앞두고 이 문제를 애매하게 다뤄 중국을 배려하는 한편, 잠재적인 분쟁의 불씨를 남겨 오키나와 주둔 미군을 정당화하려 했다”고 지적한다.
북방 4개 섬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 노골적인 간섭이 있었다. 1954년 말 당시 하토야마 이치로 일본 총리는 소련과 국교 정상화 회담에 돌입했다. 당시 일본은 북방 4개 섬 가운데 시코탄과 하보마이제도 두 곳을 돌려받고 소련과 조약을 체결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자 양국의 국교 정상화를 경계한 미국의 개입이 시작된다. 1956년 8월18일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런던에서 시게미쓰 마모루 일본 외무대신을 만나 “만약 일본이 2개 섬으로 만족한다면 미국도 오키나와(당시 미국의 신탁통치 중이었다)에 영원히 머물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일본 정부는 ‘2개 섬 우선 반환론’에서 ‘4개 섬 일괄반환론’으로 선회했고, 이후 지금까지 러시아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견줘 독도에 대한 미 정부의 입장은 분명히 제시된 편이다. 1951년 8월 딘 러스크 미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는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한국 정부의 의견서에 대한 회신에서 우리 정부의 주장을 부정하는 서한을 보낸 바 있다. 그러나 1952년 1월 한국이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고 섬에 대한 실효지배를 시작하자, 자유진영의 분열을 우려해 이를 시정하려는 일본의 시도에 협조하지 않는다. 이후 미국은 “영토분쟁은 두 나라가 평화적으로 해결할 문제”라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알렉시스 더든 미국 코네티컷대 교수는 <이코노미스트>에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토분쟁과 관련된) 역할을 한 것을 인정해야, 모든 당사국들에 미국이 아시아 지역주의를 발전시키기를 진심으로 원한다고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 베이징/박민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