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의 사회과학
[자료]역사왜곡은 언제나 악인가- 케네디가 구성한 역사
DemosJKlee
2014. 8. 14. 03:23
역사왜곡은 언제나 악인가? |
안병진의 'X파일 이야기'<7> 케네디가 '구성'한 역사 | |
기사입력 2005.10.19 09:52:00 | 최종수정 2005.10.19 09:52:00 | 안병진 창원대 교수 | insight@pressi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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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늘 '사실'이라기보다 '개념'**
지난번 6회째 글이 소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후르시초프 소련 서기장의 혼돈스러운 두 가지 종류의 친서에 대응한 케네디의 이른바 '창조적 해법'을 소개한 바 있다. 그 핵심은 비밀리에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을 특사로 보내 우방국인 터키에 배치된 미국의 미사일을 철수하는 대가로 쿠바의 핵미사일 철수 양보를 얻어낸 것이다.
케네디가 진작 수용했어야 할 이러한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은 동양 속담에 있는 역지사지라는 표현처럼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미국 입장에서 앞마당인 쿠바에 배치된 소련의 공격용 무기가 심각한 공포를 유발한다면 당연히 소련 앞마당인 터키에 배치된 미국의 공격용 무기도 그들에게 마찬가지 효과를 낳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쿠바 핵미사일과 달리 터키 미사일은 안 그래도 철거하려던 고물이라는 점에서 미국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환상의 타협안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국제 관계의 현실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이 타협안이 성공하려면 미국은 이를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했고, 또 터키 미사일 철수가 행동 대 행동의 상응하는 대가가 아니라 관련 없는 우연한 일처럼 보여야 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냉전의 정점이었기 때문이다.
막후 딜이 공개되었다면 소련을 악의 축 정도가 아니라 악의 화신으로 알고 있던 시절에 그들에게 당근을 제공한 케네디는 보수 강경파들의 여론몰이에 의한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밀약이 공개되면 터키를 비롯한 나토 우방국들은 자기들을 쿠바 문제 해결을 위해 팔아먹었다고 성토했을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케네디는 고물 덩어리 대신에 터키에 폴라리스 핵 잠수함을 추가 배치하여 오히려 안보를 강화했지만 현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사실이 아니라 개념이다.
***위기…밀약…은폐…왜곡…음모…그리고 평화**
이러한 밀약 하에 악몽과 같았던 위기는 일단 극적으로 종료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비록 극적 위기는 종료되었지만 아무런 문서화된 보장도 없고 여전히 서로를 악의 제국이라 믿는 상황에서 위기의 불꽃은 언제든지 점화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비록 당시 후르시초프는 문서화된 보장을 줄곧 요구했지만 케네디로서는 혹시라도 그것이 공개될 수도 있다는 우려감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케네디는 후르시초프가 그에게 보낸 친서에서 이 막후 딜을 암시하는 문구를 보고 분노하여 대타협안을 백지로 돌리겠다고 위협까지 할 정도였다. 결국 후르시초프는 새로이 친서를 작성해야만 했다. 위기 해결 과정에서 케네디에 대한 신뢰를 부분적으로 회복한 후르시초프는 결국 아무런 공식적 보장 없이 위기를 해소했고 그의 지혜로운 판단은 몇 개월 후 케네디가 약속을 지킴으로서 증명됐다.
비록 이제 후르시초프마저 완전히 물러서서 위기는 지나간 듯이 보였지만 다시 위기를 점화시킬 인화 물질들은 여전히 사방에 깔려 있었다. 그 중 케네디로서 가장 큰 골칫덩이는 소련과의 밀약이라는 거대한 인화물질이었다. 고심 끝에 그는 이 밀약의 내용을 은폐하고 역사를 왜곡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그의 판단으로 이 밀약은 그저 과거사가 아니라 위기의 현재와 미래의 궤도를 전혀 다르게 구성할 수도 있는 살아 있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즉시 그의 친구인 바틀렛이라는 언론인을 불러 쿠바 미사일 위기의 전 과정을 집필하도록 지시했다. 물론 터키 밀약을 빼고 말이다. 이는 당시 언론에 공개돼 사람들의 미사일 위기에 대한 공식화된 기억을 '구성'하게 됐다. 그는 심지어 아이젠하워등의 전 대통령들에게도 밀약을 철저히 숨기고 왜곡된 브리핑을 했다.
더구나 그는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위기 과정에서 유화파였던 스티븐슨 유엔 대사가 터키 밀약이라는 헛된 소문을 퍼뜨린 주인공이라는 유언비어를 언론에 고의로 흘렸다. 케네디의 비열한 인신공격 때문에 민주당에서 가장 지적인 대정치가이고 평화의 사도로 꼽히던 스티븐슨 대사는 결국 유약하고 음모적인 인물이라는 비난에 한참동안 시달려야 했다.
케네디의 음모는 '다행히도' 성공했다. 그 뒤 일련의 소위기를 겪긴 했지만 점차 위기는 퇴조했고 몇 개월 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터키에서 조용히 미국 미사일이 철거됐다. 그리고 케네디와 후르시초프는 새로이 평화공존의 기틀을 닦았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정상들 간의 핫라인도 바로 그러한 3차대전 직전까지 갔던 위기의 긍정적 부산물이다.
***역사에서 배우는 '미국 강경파'들의 실체**
과연 그 당시 케네디의 역사왜곡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그 당시 위기를 평가하는 이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생각들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이 항상 투명한 것이 최선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의 삶에는 투명성 말고도 다른 여러 가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선거를 비밀투표가 아니라 '투명하게' 공개로 하자고 주장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다.
케네디의 밀약에 대한 과거 비밀자료를 뒤지던 본인의 뇌리에는 자꾸만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대북 송금 특검 사건이 떠오른다. 과거 김대중 정부가 정상회담의 대가로서 북한에 달러를 송금했는지의 여부를 조사할 것인지의 논란 말이다. 만약 케네디였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가 살아 있다면 대북 송금이란 것도 말하자면 노후화된 터키 미사일과 같은, 유쾌하지는 않으나 불가피한 비용이라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전쟁을 막기 위해 노후화된 터키 미사일을 포기한 그로서는 94년 한반도의 끔찍했던 전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비용으로, 그것도 노태우 전대통령이 러시아에 날린 30억불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것이 그리 큰 돈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원점인 미국과 쿠바의 관계 만큼이나 향후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우리는 수많은 지뢰밭을 건너야 한다. 유연한 해결책의 장애물은 카스트로마저 끔찍해할만한 북한의 가공할 '전투적 생존주의'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에는 쿠바와의 어떠한 생산적 수교도 반대하고 무산시키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이익집단의 잡초가 62년 당시와 비교해 플로리다 주 등에 무성하게 자라나 있다. 그런데 불길하게도 이제 북한에 대한 이익집단도 무시 못 하게 자라나고 있다. 지난 번 쉽게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인권법은 이제 양 당에 걸친 이들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지난번 대북 송금문제가 불거진 계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대부분이 잊었지만 그것은 미의회 조사국의 래리 닉스라는 이의 폭로에서 시작된다. 당시 선제공격론을 숭상했던 미국의 강경파들이(그들은 현 부시 대통령의 선제공격 독트린의 원조들이다) 비록 케네디의 터키 딜은 무산시키지 못했지만 한반도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뜻을 이룬 셈이다. 앞으로 제2, 제3의 래리 닉스는 더욱 세련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케네디의 고민을 심도 깊게 성찰하고 또 위기 해결 과정에서 그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우리가 과거 역사를 부단히 돌아보고 재해석해나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점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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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진 창원대 교수 (insight@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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