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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의 이양 - 마루야마 마사오

DemosJKlee 2014. 11. 11. 22:04

 (...) 그러나 그런 자유로운 주체의식이 존재하지 않으며 각자가 행동의 제약을 자신의 양심 속에 지니지 않고 보다 상급자(궁극적 가치에 가까운 사람)의 존재에 의해 규정됨으로써 독재 관념 대신에 억압의 이양(移讓)에 의한 정신적 균형의 유지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위로부터의 억압감을 아래로 자의적으로 발휘하여 순차적으로 이양되어감으로써 전체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는 체제인 것이다.

 


     그야말로 근대 일본이 봉건사회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큰 ‘유산’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찌(福澤諭吉)는 “개벽(開闢)의 첫머리부터 이 나라에서 이루어져온 인간들 사이에 정해진 법칙”인 권력의 편중이라는 말로 교묘하게 그런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위 아래의 명분이 분명하고 그 명분과 더불어 권리와 의무를 달리하고 있어서, 무리함을 당하는 사람도 한 사람도 없고 또 무리를 행하는 사람도 한 사람도 없다. 무리하게 억압하거나 또 무리하게 억압당하여, 이쪽을 향하여 굽히면 저쪽을 향하여 어깨를 펼 수가 있다...... 앞에서의 치욕은 뒤쪽의 유쾌함에 의해 보상받기 때문에 불만족을 평균하여...... 마치 서쪽 이웃에서 빌린 돈을 동쪽 이웃에게 독촉하는 것과도 같다(『文明論之槪略』券5).

 


   여기서도 사람들은 곧바로 군대생활을 연상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의 국가질서 구석구석에까지 내재되어 있는 운동법칙이 사실상 군대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었을 따름이다. 근대 일본은 봉건사회의 권력의 편중을 권위와 권력의 일체화에 의해 정연하게 조직했다. 그리고 일본이 세계의 무대에 등장함과 더불어 그 ‘억압의 이양’원리는 다시 국제적으로 연장되었던 것이다. 메이지유신 직후에 타올랐던 정한론(征韓論)이나 그 후의 대만 파병 등은 바쿠후 말기 이래 열강의 중압을 끊임없이 피부로 느끼고 있던 일본이 통일국가 형성을 기회로 일찌감치 서구 제국주의의 소박한 모방을 시도한 것으로, 거기에 ‘서쪽 이웃에서 비린 돈을 동쪽 이웃에게 독촉’하려는 심리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건대 메이지 이후 오늘날까지의 외교 교섭에서 대외강경론은 언제나 민간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도 시사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국이나 필리핀에서의 일본군의 포악한 행동거지에 대해서도, 그 책임의 소재는 어떻든 간에 직접적인 하수인은 일반 사병이었다는 뼈아픈 사실에서 눈길을 돌려서는 안 될 것이다.

 


   국내에서는 ‘비루한’인민이여 영내에서는 이등병이지만, 일단 바깥에 나가게 되면 황군(皇軍)으로서의 궁극적 가치와 이어짐으로써 무한한 우월적 지위에 서게 된다. 시민생활에서, 그리고 군대생활에서 압박을 이양해야 할 곳을 갖지 못한 대중들이 일단 우월적 지위에 서게 될 때, 자신에게 가해지고 있던 모든 중압으로부터 일거에 해방되려고 하는 폭발적인 충동에 쫓기게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의 만행은 그런 난무(亂舞)의 슬픈 기념비가 아니었을까(물론 전쟁 말기의 패전 심리나 복수심에서 나온 폭행은 또 다른 문제이다).

 

 

 

--- 마루야마 마사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61~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