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에 ‘생명’, ‘녹색’, ‘평화’라는 말은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흔한 용어가 되었다. 이들 용어는 정부의 공익광고만이 아니라 이를 자신들의 브랜드 가치로 치장하려는 기업들의 상업광고를 통해서 하나의 ‘이미지 상품’으로 유통되고 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이들 문구를 쉽게 접하게 되고, 그러다보니까 이제 우리는 ‘녹색’과 ‘평화’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자유에 대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법을 빌어 얘기한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녹색’과 ‘평화’에 대한 외견적인 친숙함은 이들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데서(게다가 남용하는 데서) 오는 결과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쉽사리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모호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녹색’이고 어떤 ‘평화’인가?
유럽 국가들에는 ‘녹색’과 ‘평화’를 내건 대표적 정당으로 녹색당이 있다. 그 중 독일, 프랑스, 핀란드에서는 녹색당이 연립정부 파트너로서 집권당이 되기도 하였다. 유럽 녹색당에서 가장 오래되고 성공한 독일 녹색당의 산파역 중 한 사람이 페트라 켈리(Petra Kelly)인데, 그녀는 산업화 이후 지난 수세기는 탐욕과 정복, 폭력의 역사였다면 우리의 미래에는 비폭력, 화해, 평화, 공존이 있으며, 그 모든 것의 이름이 바로 녹색이라고 말한바 있다. 우리나라에도 녹색당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의 모임인 초록당사람들(준)에서는, 초록주의(녹색주의)를 “생명을 섬기고 삶을 나눔으로써 평화로운 공존의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들은 모두 ‘녹색’의 개념 안에 ‘생명’, ‘평화’, ‘공존’이라는 가치를 한데 어우른 것인데, 이것만으로는 아직도 ‘녹색’과 ‘평화’가 무엇인지 눈앞에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는다.
사실 ‘녹색’이라는 개념은 매우 포괄적이고 광범위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에 따라서 그 의미하는 바가 다를 수 있다. 담론이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미 여러 상이한 녹색담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지구환경정치학담론(The Politics of the Earth)을 쓴 존 드라이제크(John S. Dryzek)는 환경담론을 크게 ‘지구의 한계상황과 그에 대한 부정’, ‘환경 문제 해결’, ‘지속가능성에 대한 요구’, ‘녹색근본주의’ 등 네 가지로 나누고 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구도완 박사(환경사회연구소 소장)가 산업주의 유지/변형, 그리고 낭만주의/합리주의를 기준으로 해서, 우리나라 환경담론을 생태권위주의, 지속가능발전론, 녹색 낭만주의, 그리고 녹색 합리주의로 나누고 있기도 하다.
평화의 개념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전통적으로 평화의 반대는 전쟁의 부재로 인식되었고 국제 정치에서 국가의 안전이나 국가 간의 평화는 세력 균형을 통해 추구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고 난 이후 평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인도의 간디연구소장으로 오랫동안 평화와 개발 문제를 연구한 수가타 다스굽타(Sugata dasgupta)는 1968년 ‘평화의 부재와 나쁜 개발(Peacelessness and Maldevelopment)’이라는 논문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였다. 그는 전쟁이 없는 것만 가지고 평화라고 할 수 없다면서 기아, 빈곤, 질병 등을 ‘평화의 부재(peacelessness)’라는 상태로 보았다. 이를 이어받아서 평화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전쟁의 부재를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 그리고 기아, 빈곤, 질병 등의 구조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로 구분하였다. 하지만 이삼열 교수(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가 말하듯이, 평화라는 말은 인류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좋은 말’들이 모여 이뤄진 개념이지만 정작 그에 대해서는 비둘기 몇 마리 그리는 것이 고작일 정도로 구체화된 경험이 빈약하다.
대안적 국가 모델 : 녹색국가와 평화국가
‘녹색’과 ‘평화’ 개념이 갖는 모호함 그리고 그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하는 가운데, 시민 사회 안에서는 지난 몇 년 간 녹색국가 및 평화국가 만들기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녹색국가는 개발국가에 대해, 그리고 평화국가는 안보국가에 대해서 새로운 대안적 국가 모델로 제시된 것이다.
서구 근대화 과정을 뒤쫓아 가는 경제 성장 중심의 개발 모델은 1972년에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통해 처음으로 문제가 제기된 이후, 1987년 브룬트란트 보고서로 알려진 「우리 공동의 미래」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이 제안되면서 더 이상 정당성을 갖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녹색 국가에 대한 논의는 기존의 개발 국가를 부정하면서 개발 국가 체제가 만들어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주체로서 국가를 내세우고 있다. 세계화의 광풍 속에서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키는 국가의 능동적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다.
한편 평화 국가는 이를 처음 제기한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에 따르면, 평화를 제일의 가치로 삼고, 시민이 주체가 되어 평화적 방법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정치공동체로 정의된다. 또한 ‘평화 국가 만들기’는 남한이 안보 국가에서 평화 국가로 전환함을 통해 한반도 분단체제를 허물고 동아시아 평화네트워크를 구성하며 종국에는 지구적 차원에서 평화 국가의 연합을 형성하고자 하는 이론적 실천적 기획이라고 설명된다. 이에 따라 평화 국가는 국가 안보에서 공동안보 및 협력안보로 전환되고, 윤리외교·분쟁예방 외교·평화 외교를 통해 국제적으로 그리고 지역적으로 평화공동체 형성을 지향한다.
하지만 이러한 녹색 국가와 평화 국가 논의는 아직 우리 사회의 공론장에 착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무한경쟁 체제가 강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녹색 국가로의 전환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와 불안이 우리 사회에 강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국제관계에서 ‘평화 국가 만들기’ 기획은 너무 순진한 발상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와 함께 녹색 국가와 평화 국가에 대한 기획이 아직은 문제를 제기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을 뿐, 이를 구체화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의제들과의 연계성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더 이상의 논의를 이끌어 나가지 못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사회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서구의 발전국가를 모델로 해서 그들을 따라잡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면, 앞으로 100년은 우리의 역사의식과 철학이 담긴 국가발전 모델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시기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시민사회 일각에서 시작된 대안 국가 모델로서의 ‘녹색 국가와 평화 국가 만들기’ 기획은 매우 소중한 것으로 이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녹색ㆍ평화 국가와 남북한 개발 협력
녹색국가, 평화국가에 대한 비전은 남북한이 개발 협력을 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사실 긴급구호 차원의 인도적 지원은 발전 모델에 대한 고민이 없어도 추진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최근 국제 기구의 긴급 구호 활동은 기계 장치가 작동되듯이 매뉴얼에 의해 정해진 순서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이를 위해 각 지원 기구들은 홍수, 지진, 분쟁 등 재난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6개월 이내의 긴급구호 활동을 넘어서서 복구(개발구호) 활동을 추진하게 되면 재난 예방과 대비를 위한 역량 구축을 위해 보다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개발협력 활동으로 들어서게 되면, 개발지원 기구들은 해당 국가 또는 사회의 발전 모델에 대한 자신들의 분명한 정책을 갖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대북 지원이 인도적 지원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발전’ 또는 ‘개발’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 대해 우리 사회는 그동안 암묵적으로 남한 사회를 북한의 발전 모델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경제 성장 중심의 발전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에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으로, 그것이 대북 지원에도 그대로 투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발전 이데올로기는 노무현 정부의 대북 SOC 지원계획이나 10. 4 선언에도 강하게 나타나 있으며,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은 경제 성장 중심의 발전 이데올로기를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북한의 바람직한 발전상에 대해서는 시민 사회도 아직 분명한 자신의 입장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일부 쟁점들에 대해서는 시민 단체 사이에서도 인식의 편차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환경단체들은 북한에 대규모 전력을 공급하는 것보다 신재생에너지 시설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많은 대북지원 단체들은 환경단체들의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을 표시하지만, 그것이 북한의 에너지 문제 해결의 대안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는 북한 식량문제 해결 방식과 관련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또한 북한의 입장에서는 남한은 원자력과 석유 에너지에 의존하고 증산 위주의 화학 농업을 주로 하면서 북한에게는 신재생에너지와 유기 농업을 강요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결국 남북한의 개발 협력을 위해서는 그 이전에 남과 북 양쪽에서 모두 받아들여질 수 있는 통일 국가의 미래상을 우선적으로 마련하는 것이 요구된다. 우리의 상상 속에 21세기의 새로운 통일 국가는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그 해답을 우리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녹색 국가·평화 국가라는 대안적 국가 모델에 대한 기획을 심화시키는 것을 통해서 찾아야 할 것이다.
원문: http://www.kcrc.or.kr/?doc=bbs/gnuboard.php&bo_table=z_special&wr_id=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