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확대경

베트남전 반전탈영병 지원 망명 운동, 한국계 미국인 김진수 한국인 탈영병 김동희의 이야기

DemosJKlee 2017. 11. 13. 19:29

[세상 읽기] 조직을 지키는 것과 운동을 지키는 것 / 후지이 다케시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8652.html#csidx7b40de45e56d54e8646d0bd72616d98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50년 전 11월13일. 일본 도쿄에서 대중적인 베트남 반전운동을 펼치던 시민운동단체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베평련)이 기자회견을 했다. 요코스카에 정박 중인 미국 항공모함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해 탈영한 4명의 미군을 무사히 탈출시켰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유럽에서는 베트남전 참전을 거부한 미군들의 탈영이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도 미군들의 탈영을 조직적으로 지원하는 모임이 생겨났다. 주로 베평련에서 활동했던 이들이 만든 자텍(JATEC, 반전탈영미군원조일본기술위원회)이 그것이다.


그들은 이듬해 4월에도 한국계 미국인 김진수를 비롯한 6명의 탈영 미군을 탈출시킨 것을 시작으로 6월에 3명, 9월에 4명을 스웨덴으로 보내는 데 성공한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미군 쪽에서 탈영병에 대한 수사를 일본 경찰에 요청했기 때문에 탈영병들을 보호하는 작업은 일종의 지하활동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을 며칠씩이라도 숨겨주려는 이들은 많았고, 그 대부분은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침략전쟁을 거부해 탈영한 군인들에 대한 대중적인 공감이 그들을 지켜냈다.


하지만 자텍에도 큰 시련이 닥쳤다. 미군 쪽에서 탈영병을 위장한 스파이를 보낸 것이다. 사실 적지 않은 활동가들이 그가 스파이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대부분 탈영병들이 불안정하고 규율화가 덜된 모습을 종종 보였던 반면에 그는 안정되고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그의 존재를 두고 운동 내부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가 스파이라면 같이 탈출해야 할 탈영병이 위험해지고 또 지금까지 그들을 해외로 탈출시켰던 비밀경로가 들통날 수 있기에 신중해야 했다. 하지만 결국 자텍 멤버들은 99% 의심스러워도 1% 진짜 탈영병일 가능성이 있다면 믿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같이 탈출하려던 미군은 체포되었고 10여명을 탈출시킨 경로는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중심적으로 움직이는 멤버가 누구인지도 경찰에 알려져 자텍 조직은 거의 무너졌다.


그런데 그때 책임자로 활동했던 구리하라 유키오(栗原幸夫)는 30년이 지난 뒤에 당시를 회고하며 그때 판단이 옳았다고 말했다. 조직을 지키기 위해 탈영병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면 오히려 탈영병을 지원하는 운동 자체가 붕괴했을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가 보기에 조직의 파괴를 두려워하는 까닭은 그 조직을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사실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대중에 대한 불신이다. 원래부터 대체 불가능한 지도자를 만들지 않기로 했던 자텍은 이런 발상을 거부했고, 역설적이게도 조직을 희생시킴으로써 운동을 지켜냈다. 일단 조직은 파괴됐지만 몇 달 뒤 다른 이들에 의해 자텍이 재건되었고, 기관지를 내는 등 오히려 더욱 운동을 공개적으로 펼치면서 탈영병 지원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시민들에게 자텍을 지원해 달라고 하지 않고 알아서 자텍이 되어 달라고 호소했다. 실제로 여러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자텍이 생겨서 미군기지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직의 파괴는 오히려 운동의 확산을 낳았다.


자텍의 경험은 조직의 파괴가 운동의 끝이 아니며 조직을 지키려는 행위가 오히려 운동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촛불 1년을 지난 지금, 자텍이 보여준 운동의 역사를 통해서 조직이란 무엇인지, 또 운동의 지속이란 어떤 것인지 한번 근본적으로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


[한겨레21] 입력 2011.09.23. 18:12 수정 2011.09.23. 18:12

[권혁태의 또 하나의 일본] 베트남 파병을 거부한 두 탈영병 김동희와 김진수…평화헌법 믿고 일본 찾았으나 밖으로 내쳐진 그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신문 등에 등장하는 화려하게 치장된 공적인 역사 뒤에 가려진 '어둠'의 관계가 종종 시간차를 두고 우리 앞에 돌연 나타나 기존의 상식을 뒤집기도 한다.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깊으면 깊을수록, 잦으면 잦을수록 빛의 역사는 많지만 그만큼 어둠의 역사도 많은 법이다. 정부로부터 여권을 발급받고 가고자 하는 나라의 정부로부터 비자를 교부받아 비행기나 배로 국경을 넘는, 사람의 이동이 철저히 관리·통제되는 오늘날의 국경 감각과는 다른 과거가 불과 몇십 년 전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통해 공적인 역사에 가려져 있는 또 하나의 역사를 상기해보자.


북행된 뒤 소식 끊긴 김동희


1960년대 베트남 파병을 거부했던 한국인은 공적인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래에 소개하는 두 한국인은 베트남전쟁 참전을 거부하고 '밀항'과 '망명'을 통해 국경을 넘은 사람들이다. 탈영, 망명으로 이어지는 두 사람의 인생 유전의 무대가 된 것은 일본이지만, 이 무대에 한국·베트남·미국·북한·쿠바가 등장한다. 두 사람에 대한 자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신문에는 미군 병사 김진수(金鎭洙)에 대한 단신 기사가 등장할 뿐이다. 일본의 국회 회의록, 운동단체의 기관지나 회고록 등 단편적인 일본 쪽 자료를 통해 두 사람의 인생 유전을 되짚어볼 수밖에 없다.







김동희(金東希)는 1965년 7월3일 부산에 있던 육군병기학교를 탈영한다. 계급은 병장이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베트남 파병 명령을 거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말한다. "죄 없는 베트남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 또 나를 포함한 한국군도 죽고 싶지 않다." 그리고 8월15일 조그마한 어선에 몸을 싣고 일본 대마도로 향한다. 밀항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불행히도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그리고 출입국 관리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약 1년의 징역형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한다. 1967년 2월19일 형기를 마치고 형무소를 나온 김동희를 기다린 것은 '감옥 아닌 감옥' '감옥보다 더한 감옥'인 오무라 수용소였다. 나가사키에 있는 오무라 수용소는 주로 '강제 송환'을 위해 조선인을 가둬두려고 만든 시설이지만, 형무소보다 더한 인권유린 등으로 악명 높은 곳이다. 일본 '망명'을 하겠다는 그의 요구는 일본 정부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거나 수용소에서 기약 없는 '감옥 생활'을 견디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결국 한국 강제 송환을 피하기 위해 북한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일본 정부는 1968년 1월26일, 갑자기 그를 소련의 나홋카행 선박에 태워 북한으로 향하게 한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북한에 도착했는지, 아니면 그대로 소련에 머물게 되었는지 그의 행적이 알려진 바는 전혀 없다. 오무라 수용소에 있던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자 동분서주한 일본의 평화시민단체 베헤이렌(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을 주도한 소설가 오다 마코토의 회고록에 따르면, 1976년 10월 김일성 북한 주석과 만났을 때 그의 소식을 물어보자, 후일 "그런 사람은 북한에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그의 '북행'은 강제 송환을 요구하는 한국 정부와 '일본 망명'을 요구하는 일본 내 시민단체 사이에서 선택한 일본 정부의 결정이었지만, 그의 '북행'을 위해 실제로 일본 정부가 북쪽과 접촉을 했는지도 밝혀진 바 없다.


베트남전쟁에서 한국을 본 김진수


또 한 사람인 김진수에 대해서는 < 동아일보 > 1968년 1월11일치에 단신 기사가 있다. "도쿄에 있는 '큐바' 대사관은 작년 4월 망명을 요구, 동 대사관에서 보호 중이던 서울 태생의 한국계 미군 일등병 케네스 크릭스(22·한국명 김진수)가 '잠적했다'는 사실을 지난해 12월29일 일본 외무성에 통고해왔음이 10일 밝혀졌다. 이 도망병은 서울 태생의 고아로서 열한 살 때 미국인 '크릭스'의 양자가 되어 도미, 5년 전 미 육군에 지원입대하여 재일 미군부대에 근무하다가 지난 66년 월남 주재 미191병기대대 특기병(타이피스트)으로 전속 근무 중, 도쿄의 큐바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던 것이다." < 경향신문 > 은 1968년 1월13일 일본 신문의 보도를 인용해 김진수가 "북한으로 탈주한 듯"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의 미국 이름인 케네스 그릭스를 크릭스로, 그리고 스웨덴을 북한으로 보도한 것만 빼면 대체로 사실에 부합된다.


김진수는 서울 태생으로 한국전쟁에서 부모를 읽고 전쟁고아가 되었다. 미군 병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시민권을 얻으려고 미군에 입대하고 한국·일본의 미군기지를 거쳐 베트남에 파병된다. 휴가차 일본에 들른 그는 1967년 4월 탈영을 감행해 주일 쿠바대사관에 몸을 맡기고 쿠바 망명을 요구한다. 쿠바 정부 쪽은 망명을 받아들여 안전한 '일본 탈출'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지만, 일본 정부는 미국 쪽의 인도 요구를 받아들여 이를 거부한다. 결국 그는 쿠바대사관을 몰래 빠져나와 당시 미군 탈영병을 지원하던 베헤이렌의 도움을 받아 소련을 거쳐 스웨덴으로 망명한다. 그의 일본 탈출은 김동희와는 달리 '밀항'이었던 듯하다. 김동희와 마찬가지로 그의 행적은 그 뒤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베헤이렌 사무총장을 지낸 평화운동가 요시카와 유이치의 증언에 따르면, 망명 이후 두 번 정도 일본을 찾았고 북유럽에서 가구 무역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의 탈영과 망명은 모두 베트남 파병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에서 징병을 거부한 사람은 무려 57만 명에 달한다. 이 중 2만5천 명이 기소되었고 9천 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전설적 권투 선수인 무하마드 알리도 이슬람교의 원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해 챔피언 벨트까지 박탈당했다. 또 베헤이렌의 도움을 받아 베트남에서 탈영해 제3국으로 망명한 미군 병사도 있다. 베트남전쟁을 다룬 황석영의 < 무기의 그늘 > 에는 미군 탈영병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따라서 미군 병사 김진수의 탈영과 망명은 분명히 특수한 사례는 아니다. 하지만 김진수의 탈영에는 베트남전쟁을 한반도 맥락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그의 고뇌가 자리하고 있다. 그의 일본 탈출 이후 그의 지원자들에 의해 발표된 '미국, 일본 그리고 세계 인민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김진수는 말한다.


그들은 왜 일본으로 갔나


"미국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나는 미국 시민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미국 군대에 들어가 일개 병사가 되어 한국·일본, 그리고 마지막에는 베트남에 파병되어 우선 남한의 참혹한 현실을 보고 동시에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에서 전쟁이 가져다준 상황을 보고 만일 미국이 한반도에서 행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베트남에서도 목적을 이루려 한다면 베트남 사람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그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이에 가담하는 것, 미 합중국의 시민이 되는 것, 즉 실제로는 범죄자가 되는 것에 그 어떤 흥미도 희망도 품지 않게 되었"고 "지금의 미국"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탈영을 감행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전쟁고아로 내몬 한국전쟁의 경험에서 베트남전쟁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탈영과 망명은 일본이라는 무대 위에서 펼쳐졌다. 왜 그럴까? 물론 당시 앞에서 말한 베헤이렌이라는 시민단체가 존재하고 베트남 미군 탈영병을 돕는 '반전탈주 미군 병사 원조 일본 기술위원회'(JATEC)가 조직적 활동을 통해 이 병사들의 제3국 망명을 비합법적으로 전개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많은 미군 탈영병들은 이들 조직의 존재를 사전에 알고 탈영을 감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이 베헤이렌이나 JATEC의 존재를 탈영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정황은 전혀 파악되지 않는다. 이들 단체의 도움을 받은 것은 모두 탈영 이후다. 그렇다면 이들을 일본으로 이끈 것은 다른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김동희 자신이 '망명 신청서'에서 "헌법 전문 및 헌법 제9조의 전쟁 포기를 규정한 평화주의를 관철시키려 노력하는 일본"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듯이 평화헌법이 이들을 일본으로 이끈 배경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무장과 무력 사용을 금지하는 일본의 평화헌법을 일본 사회가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면, 이들의 망명극은 일본에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평화헌법은 실제로 기능하지 않았고 오히려 베트남전쟁을 위한 기지를 미국에 무한대로 제공하고 자위대가 무력을 증강하는 현실이 일본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을 일본으로 이끈 것은 평화헌법의 이념이었지만, 이들을 일본 밖으로 내친 것도 평화헌법의 현실이었다.


인생유전에 드리운 그늘진 역사


사실 김동희는 일본에 '거주'할 권리가 있었다. 그는 1937년 제주도에서 태어났지만 바로 일본으로 건너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일본에서 거주했다. 해방 직후 다시 한반도 돌아갔지만, 제주도 4·3 민중봉기나 한국전쟁을 겪은 많은 제주도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그도 일본 '밀항'을 감행한다. 그의 삼형제가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으니 그의 일본 밀항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의 작은아버지가 그러했듯이( < 언어의 감옥에서 > ), 일본에서 자라난 재일조선인에게 밀항은 '가족이 사는 땅'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김동희는 1955년 4월 밀항해 약 5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민족학교에도 다녔고 일본 대학에도 입학한다. 하지만 경찰에 체포돼 1960년 3월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었고, 다시 1962년 5월에 밀항했다가 10월에 또다시 강제 송환된다. 1965년의 탈영과 밀항은 세 번째인 셈이다. 결국 '가족이 사는 땅'인 일본에서 거주하려는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종착역이 확인되지 않는 이들의 인생 유전에는 식민지, 4·3 민중봉기,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남북 분단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김동희와 김진수, 두 사람을 찾고 싶다. 그래서 공적인 역사에 가려져 있는 그림자의 역사를 보고 싶다.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고경태의 1968년 그날

망명객 혹은 ‘홈리스’ 김진수

⑯ 주일본 쿠바대사관에 망명신청했다가 스웨덴으로 탈출한 베트남전 참전 한국계 미군병사 이야기


제1010호

등록 : 2014-05-09 17:34 수정 : 2014-05-09 18:36


김진수(22·이하 괄호 속 숫자는 당시 나이)는 홈리스 신세였다.

1968년 1월1일, 그는 소파에 누워 쪽잠을 자다 눈을 떴다. 24시간 영업하는 도쿄 중심가 신주쿠 심야다방의 창문으로 새해 첫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화장실로 가 세수를 했다. 몸을 눕힐 거처를 찾지 못하고 헤맨 지 4일째다. 신분증을 요구하는 호텔은 위험했다. 오늘 밤에도 심야다방으로 돌아올 것이다. 3일 전의 행동은 무모했다. 사고를 치고 말았다. 1967년 12월29일, 대책도 없이 은신처인 쿠바 대사관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8개월 동안 자신을 보호해준 고마운 곳이었다. 그는 대신 일본 최대의 노동운동단체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를 찾았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연말연시 휴가철이란 점을 깜빡했다. 사람들이 출근할 때까지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길을 잃은 도망자

김진수가 쿠바 대사관에서 도망했다고 보도한 〈아사히신문〉 1968년 1월11일치 1면. 상단 머리기사는 베트남으로 가기 위해 일본을 경유할 예정이던 미 핵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 입항 반대 데모에 관한 일본 정부 입장을 다루고 있다(왼쪽). 쿠바 대사관저에서 나오지 못하고 생활하던 김진수의 근황을 전한 〈아사히신문〉 1968년 5월17일치 사회면. ‘갇힌 채 한 달 반’이라는 제목을 달고, 김진수가 쿠바 대사관저에서 대사관 직원과 탁구 치는 사진을 크게 실었다.

그는 다방에서 나와 신정 연휴를 만끽하는 신주쿠의 일본인들 틈에 섞였다. 낮엔 도쿄 거리를 정처없이 쏘다니며 시간을 때워야 한다. 미행당할지도 몰랐다. 경계하는 눈길로 주변을 살폈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먼저 식당으로 향했다. 길을 잃은 도망자. 그의 집은 어디인가. 일본인가. 아니다. 망망대해를 건너야 한다. 한국인가. 역시 아니다. 미국이다. 합법적으로는 그곳에 닿을 수 없다. 빛이 없는 어둠의 미로 속에 그가 서 있었다.

1. 금 11일 조간 아사히, 산케이 및 요미우리는 대체로 3.4단(산케이는 사회면 톱)으로 ‘그릭스’가 지난해 12월29일 ‘쿠바’ 대사관에서 도망했다고 보도함.


2. 외무성의 니이세키 정무국장은 10일 오후 기자회견에서 지난해 4월 쿠바 대사관에 정치 망명하고 있던 ‘그릭스’(한국명 김진수)가 지난해 12월29일 동 대사관 밖에 도망했다고 하고 이것은 도망한 29일 주일 쿠바 대사관으로부터 외무성에 연락이 있은 것이라고 했다고 함. 한편 외무성은 9일 ‘멘데스’ 주일 쿠바 대사를 초치하고, 유감의 뜻을 전함과 동시에 도망의 모양에 대해 사정을 들었다고 함. 지금으로서는 동 2등병이 자발적으로 달아난 것인지 어떤지는 불명이나, 멘데스 대사는 동 2등병에게 대사관 밖에 나가면 체포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외출을 금지하고 있었다고 함.


3. 산케이는 일본의 공안 당국은 이미 동 병사가 일본을 탈출해 북한에 있는 것 아닌가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함.(하략)

(1968년 1월11일 주일 한국대사가 외무부 장관 앞으로 보낸 착신전보)

일본의 한 잡지에 실렸던 김진수의 사진.

김진수(金鎭洙, 케네스 그릭스, Kenneth C. Griggs)는 베트남에서 온 미군 탈영병이었다.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에서 미191병기 대대 타이피스트 특기병으로 근무하던 중 사이타마현 존슨 미군기지로 휴가를 왔다가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쿠바 대사관으로 들어가 쿠바 망명을 신청했다. 1967년 4월3일의 일이다. 쿠바는 피델 카스트로(42)가 1959년 친미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한 뒤 사회주의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하던 미국의 적성 국가였다. 외국 공관은 외교특권을 누렸다. 미국과 일본 정부는 쿠바 대사관에 김진수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지만, 대사관 내에 진입해 그를 체포할 수는 없었다. 김진수는 “월남에서 미국의 침략 전쟁을 눈으로 보고 전쟁의 증오를 느꼈다”고 망명 동기를 밝혔다. 쿠바 정부는 ‘제국주의 제국으로부터의 망명자에게는 최대한의 지지를 부여한다는 기본 정책에 의해’ 입국을 허락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일본 정부가 출국을 허락하지 않는 한 실제로 그를 데려갈 뾰족한 수는 없었다. 하루이틀이 흘렀다. 김진수는 쿠바 대사관저에서 먹고 자고 TV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스페인어 공부와 탁구에 열중하기도 했다. 그렇게 8개월을 지내다 쿠바 대사관 사람들도 모르게 밖으로 도망 나와 홈리스 생활을 자처한 셈이었다. 쿠바 대사관저에서 새장 속의 새가 되어간다는 자조감을 느꼈을까. 체포당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모험을 하는 편이 낫다고 여겼을까.


서울 출생, 미군에 의해 입양 이민


김진수가 처음 쿠바 망명을 신청했을 때 한국 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김진수가 한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국 외교 당국은 김진수의 인적사항과 사건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긴박하게 움직였다. 한국 외무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는 다음과 같은 이력의 소유자였다. ‘1946년 12월25일 서울 출생. 1956년 11월23일 주한 미38병기대 소속 미군에 의해 입양 이민. 한국 정부에 의한 여권 발급(번호 9679). 1957년 미국 시민권 신청 각하. 1961년 시민권 신청 자격 생겼으나 신청 안 함. 미국 아이다호주에서 미성년 범죄 경찰기록 조회됨. 1963년 미 육군 지원 입대.’

다른 탈영병들과 함께 홋카이도 최동단 네무로에서 배를 타고 소련으로 간 뒤 비행기로 이동해 1968년 4월 말 스웨덴 스톡홀름 공항에 도착한 김진수(맨 왼쪽). 그 오른편으로 마크 샤피로, 테리 위트모어, 필립 캘리코트, 조지프 크메츠, 에드윈 아네트.
김진수가 1967년 4월3일 쿠바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한 이후 한국 외무부와 주일 대사관이 1년간 주고받은 문서들. 외교부는 비밀 자료로 취급했던 이 문서들을 30년이 지난 1998년 이후 공개했다.

한국 국적을 가진 미 현역 군인이 베트남에 파병됐다가 휴가지인 일본에서 쿠바 대사관으로 숨어버린 뒤 8개월 만에 잠적한 희대의 사건. 한국 정부는 김진수가 북한으로 갈까봐 노심초사했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과 남북한 간 체제 대결이 한창이던 시점에서 김진수가 북한 쪽의 선전 나팔수가 될 수도 있었다.


김진수의 홈리스 생활은 1월3일에 안정을 찾았다. 그날 밤 요시카와 유이치(37) 베헤이렌 사무국장을 만나면서부터다. 소설가이자 사상가인 오다 마코토(36)가 대표로 있는 베헤이렌(べ平連·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은 일본 내 미군기지 병사들의 탈영을 부추기고 은닉과 밀항을 돕던 일본 최대의 반전평화 단체였다(<한겨레21> 1000호 2014년 3월3일치 참조). 본래 김진수는 1월1일에 들어가지 못한 총평 사무실 문을 이틀 뒤에 다시 두드렸다. 그곳 관계자는 하룻밤을 묵고 나서 이야기하자며 알고 지내던 여주인이 운영하는 여관으로 안내했다. 한데 김진수가 탈영병임을 눈치챈 여관 여주인이 베헤이렌에 전화 연락을 취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 정부 방침에 어긋나는 베헤이렌의 탈영병 지원운동이 그 정도로 일본 대중의 믿음과 지지를 얻을 때였다.


요시카와 유이치는 김진수에게 다시 쿠바 대사관으로 들어가자고 권유했다. ‘8개월이나 신세를 졌는데 이렇게 관계를 정리하면 안 된다’는 취지였다. 요시카와 유이치는 또 “앞으로 자신의 신념과 의사를 쿠바 대사관에 정확하고 성의 있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 뒤 나오는 것이 옳다”고 설득했다. 다음날 두 사람은 쿠바 외교관 차량을 비밀리에 얻어타고 쿠바 대사관에 들어갔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요령껏 피했다. 쿠바 외교당국과 협의 뒤 다시 대사관저를 빠져나온 날은 1월7일. 이후 10여 일을 도쿄도 남쪽 가나가와현 즈시시에 있는 유명 작가 홋다 요시에(46)의 자택에서 보냈다. 한국의 외교 당국이 김진수의 쿠바 대사관 탈출 사실을 처음 인지한 1968년 1월11일 밤에도 김진수는 홋다 요시에의 집에 있었다.


망명신청 보름 뒤 알리도 징집 기피


돌고 돌아 베헤이렌 간부를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자 필연이었을까. 탈영을 결심한 계기가 바로 베헤이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67년 3월 휴가 도중 도쿄의 긴자 거리에서 읽은 한 장의 삐라를 기억했다. 베헤이렌 회원들이 나눠준 ‘미군 병사에게 보내는 일본의 편지’라는 제목의 4쪽짜리 영문본이었다. ‘베트남은 베트남인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것, 더는 베트남 사람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 상관에게 사보타주하고 부대를 이탈하라’는 내용에 마음이 흔들렸다. 김진수는 며칠 뒤 일본 공산당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를 거쳐 쿠바 대사관으로 감으로써 일본 기지에서 탈영한 최초의 미군이 되었다. 미국 본토에서는 매년 수만 명의 베트남전 징집 거부자가 쏟아지던 때였다. 공교롭게도 그가 쿠바 대사관에 들어간 다음날인 1967년 4월4일, 흑인 인권지도자 마틴 루서 킹은 베트남전 반대 발언으로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14일 뒤인 4월18일엔 세계권투협회(WBA) 챔피언 타이틀을 지닌 미국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1942년생)가 베트남전 징집 명령을 거부했다.

김진수는 이제 일본 땅을 빠져나가야 했다. 베헤이렌은 두 달 전인 1967년 11월, 항공모함 인트레피드호에서 탈영한 미군 병사 4명을 이른바 ‘요코하마 루트’(요코하마~나홋카~스톡홀름)로 탈출시켰다. 그 뒤 일본 내 미군 탈영병이 속속 출현하자 이들의 망명을 체계적으로 돕기 위해 ‘반전 탈주 미군병사 원조 일본기술위원회’(JATEC)라는 비공개 조직까지 만든 상태였다. 다음은 김진수 차례였다. JATEC는 가나가와현 즈시시에 숨어 있던 김진수를 고베·교토 등에 있는 베헤이렌 회원들의 안전한 자택으로 옮겨 묵게 하면서 밀항 작전을 준비한다.


1. 금 29일자 아사히 조간(4단)에 따르면 지난해 12월29일 쿠바 대사관으로부터 자취를 감춘 그릭스(일명 김진수)는 일본 반전운동가의 조력으로 이미 제3국으로 탈출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보도함.

2. (중략) 제종의 정보를 종합해보면 그릭스는 지난해 12월29일 전후 쿠바 대사관을 떠나 일본의 반전운동가와 접촉하고 뜻있는 인사들이 이를 받아들여 12월 말에서 1월 초 그릭스를 외국 선편에 승선시키는 데 성공, 제3국에 탈출시켰으리라는 것이 대체적인 경위인 것 같다 함. 탈출 행선지는 북한과 쿠바 중 북한 쪽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농후하다 함.(하략)

(1968년 1월29일 주일 한국대사가 외무부 장관 앞으로 보낸 착신전보)

<아사히신문>은 결정적으로 잘못 짚었다. ‘반전운동가의 조력’을 받았다는 팩트는 정확했지만, 이미 제3국으로 탈출한 것처럼 오보를 냈다. 이에 따라 일본과 한국의 외교 당국도 잘못된 정보를 취득했다. 김진수는 들키지 않고 잘 숨은 셈이다. 그사이 쿠바 대사관을 한 번 더 들고 난 사실도 미국과 일본의 정보망에 포착되지 않았다.


베헤이렌에 13만엔 거금 쾌척


<아사히신문>의 오보엔 나름의 근거가 존재했다. 김진수는 1월17일 고베에서 비밀리에 중국 배에 승선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연락 착오가 생겨 그냥 내렸고, 중국행은 무산됐다. 일본 공산당 내 마오쩌둥 혁명노선을 신봉하는 그룹의 주선으로 중국을 경유해 북한으로 갈 계획이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어수선했다. 물밑에선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 논의가 싹틀 때였다. 미군 탈영병을 반갑게 받아줄 분위기는 아니었다.


석 달 뒤인 1968년 4월21일, 김진수는 끝내 제3국으로 탈출했다. 홋카이도 최동단 네무로에서 배를 타고 소련으로 간 뒤 비행기를 타고 스웨덴으로 향하는 새로운 루트였다(스웨덴은 베트남전 당시 미국의 북폭(北爆)을 반대하고 미군 탈영병의 망명과 입국을 허락한 몇 안 되는 나라였다). 그는 떠나기 전 자신을 따뜻하게 지켜준 베헤이렌에 13만엔이라는 거금을 쾌척했다. 몇 년 동안의 월급을 아껴 모은 돈이었다. 김진수는 또한 ‘미국, 일본 그리고 세계의 인민에 보내는 메시지’라는 성명서를 남겼다. “미국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나는 미국 시민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 군대에 들어가 일개 병사가 되어 한국, 일본 그리고 마지막에는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우선 남한의 참혹한 현실을 보고 동시에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전쟁이 가져다준 베트남의 상황을 보고 만일 미국이 한반도에서 행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베트남에서도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 한다면 베트남 사람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그 미래를 생각했다.”


김진수의 탈출 여정엔 마크 샤피로, 테리 위트모어, 필립 캘리코트, 조지프 크메츠, 에드윈 아네트 등 5명의 미군 병사가 동행했다. 모두 1968년 2월과 3월에 제각각 일본의 미군기지를 탈영한 뒤 베헤이렌을 찾은 이들이었다. 마침내 6명이 스톡홀름 공항에 내리던 순간은 한 장의 사진에 담겨 있다. 미국 사진기자의 작품이다. 가장 키가 작은 김진수는 맨 왼쪽에 있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선글라스를 낀 채 먼 곳을 바라본다. ‘국가’의 존재에 대해 냉소적인 발언을 자주 하는 것 말고는 말수가 별로 없었다는 그의 알쏭달쏭한 캐릭터가 검은 안경 속에 숨은 듯하다. 깔끔한 재킷 차림에 구두를 신었다. 기타를 든 병사도 있다. 마치 친구끼리 여행 온 것 같기도 하다. 해가 쨍쨍한 1968년 4월 말의 어느 날이었다.


여행 온 것 같은 망명객들


김진수는 베트남으로 돌아가야 하는 의무를 거부했다. 이제 당분간 양아버지가 있는 미국으론 돌아갈 수 없었다. 피붙이가 남아 있을 한국으로도 갈 수 없었다. 일본에 다시 올 수도 없었다. 도피를 통한 자유는 또 다른 부자유의 시작이었다. 고독한 운명의 그림자가 망명객 김진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


그 뒤: 김진수는 1970년대 후반 또는 1980년대 초반에 일본을 찾아 자신의 탈출을 도와준 베헤이렌 사람들을 만났다고 한다. 한국에도 들러 자신을 낳아준 부모와 친척을 찾았으나 실패했다는 증언도 있다. 당시 그는 근황을 묻는 지인들의 질문에 “스위스에 살고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지금 살아 있다면 68살. 필자는 스위스 한인회와 스웨덴 한인회를 통해 그를 수소문했으나 의미 있는 답신을 얻지 못했다.


■ 참고한 글과 책

외무부 보존문서: 김진수 한국계 미군 주일 쿠바대사관 망명사건, 1967~68

‘국경’ 안에서 ‘탈/국경’을 상상하는 법: 일본의 베트남 반전운동과 탈영병사(권혁태, 2012)

베트남 ‘반전탈주’ 미군 병사와 일본의 시민운동: 생활세계의 전쟁과 평화(남기정, 2012)

隣に脫走兵かいた時代(思想の科學社,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