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외교문서 공개-연합뉴스 기사
1987년 외교문서 공개…"北 '연방제 중립국 창설' 제안"
- 기사입력2018/03/30 02:30 송고
북한이 1987년 남북간 연방제 통일을 거쳐 중립국을 창설하자는 제안을 미소정상회담 계기에 미측에 은밀히 전달한 사실 등이 비밀해제된 당시 외교문서에서 새롭게 확인됐다.
사진은 공개된 외교문서 중 일부다.
2018.3.30 jhcho@yna.co.kr
(서울=연합뉴스) 조준형 기자 = 북한이 남북간 연방제 통일을 거쳐 중립국을 창설하자는 제안을 미·소정상회담에 나선 소련 정상을 통해 미국에 은밀히 전달한 사실 등이 비밀해제된 1987년도 외교문서에서 새롭게 확인됐다.
외교부는 30일 이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 30년 이상 경과 외교문서 1천 420권(23만여 쪽)을 원문해제(주요 내용 요약본)와 함께 국민에 공개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북한 부탁을 받아 1987년 12월 9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정상회담 때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건넨 문서에는 ▲ 남북한 각각 10만 미만의 병력 유지 및 핵무기를 포함한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 남북한이 서명하는 불가침 선언 ▲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 ▲ 남북한 군을 단일한 '민족군'으로 통합 ▲ 남북한이 제3국과 체결한, 민족적 단합에 위배되는 모든 협정 및 조약 폐기 ▲ 남북한으로 구성된 연방공화국 창설 및 공화국이 중립국가 및 완충지대임을 선언하는 헌법 채택 ▲ 연방공화국의 단일 국호 유엔 가입 등 북한의 제안들이 담겼다.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민주화 운동의 불꽃이 뜨겁게 타올랐던 전두환 정권 말기 민주화 운동 탄압과 관련한 한미 외교당국간의 소통 내용도 일부 소개됐다.
6월항쟁 이후 노동자 대투쟁이 진행되던 1987년 9월 미국 정부가 "노사 분규가 악화되어도 대화를 통한 정상적 타협으로 사태가 수습되기를 희망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군의 사용을 회피하기 바란다"는 입장을 우리 측에 전달한 사실도 드러났다.
또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과 관련해 우리 외교당국이 "우발적 사고"라면서 사태의 파장이 국제사회로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전개한 사실, 미국 유력지 뉴욕타임스에 실린 정권 비판성 기고문과 변형된 태극기 삽화에 강력 항의한 사실 등도 확인됐다.
아울러 미국 정부가 1986년 부산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 당시 우리 측에 기물 파손 등을 이유로 1만 2천여달러의 변상을 요구한 사실도 외교문서에 적시됐다.
동서냉전의 막바지에 이뤄진 당시 남북간의 치열한 체제 경쟁과 갈등의 단면도 이번 외교문서에서 드러났다.
공개된 문서에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 앞서 긴장완화 등을 위해 이뤄진 미국의 대(對)북한 외교관 접촉지침 완화인 이른바 '시거 구상'의 이행이 KAL기 폭파사건으로 철회된 과정과, 당시 북한 외무상이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우간다를 상대로 올림픽 보이콧을 종용한 정황도 포함돼 있다.
더불어 북한이 1983년 일본인 토목기술자를 초청해 땅굴과 관련해 자문한 정황도 확인됐다.
이밖에 한일 대륙붕 공동개발, 미국의 대이란 무기밀매 사건, 조지 슐츠 당시 미 국무장관의 방한, 남남(南南)협력에 관한 비동맹특별각료회의, 한·프랑스 수교 100주년 기념사업, 미국의 종합통상법안에 대한 대책 등 관련 문서들도 이번에 공개됐다.
공개된 외교문서의 원문은 외교사료관(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 2572)의 외교문서열람실에서 열람이 가능하며, 외교문서 공개 목록 및 외교사료해제집 책자는 주요 연구기관·도서관 등에 배포된다.
원문 요약(해제) 내용은 외교사료관 홈페이지(http://diplomaticarchives.mofa.go.kr)와 모바일에서도 검색할 수 있다고 외교부는 전했다.
외교부는 매년 자체 심사를 거쳐, 1994년부터 25차에 걸쳐 총 2만5천여권(340만여 쪽)의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jhcho@yna.co.kr
2018/03/30 02:30 송고.
[외교문서] 北, 87년 고르바초프 통해 '연방제 중립국' 제안
- 기사입력2018/03/30 02:30 송고
단일국호 유엔가입 등도 주장…당시 韓정부 "현실성 없다" 일축

(서울=연합뉴스) 조준형 기자 = 북한이 1987년 12월 미·소 정상회담에 나선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통해 미국 측에 한반도 완충지대 및 중립국 창설 방안을 제안한 것으로 파악됐다.
외교부가 30일 공개한 1987년 외교문서에 따르면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1987년 12월 9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정상회담 때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북한의 제의 문서를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건넸다.
'한반도 완충지대 설정 및 중립국 창설을 위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안'이라는 제목의 문서(4개항)에서 북한은 "남북한이 오직 자위의 목적을 위해서만 필요한 정도의 규모로 단계적인 대규모 감군을 단행"하자며 "남북한 각각 10만 미만의 병력 유지 및 핵무기를 포함한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를 제안했다.
또 남북한이 서명하는 '불가침 선언'을 제안하면서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고, 중립국 감시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해 감군 절차를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남북한 군을 단일한 '민족군'으로 통합하자고 제의했다.
이와 함께 북한은 '군사협정을 포함해 남북한이 제3국과 체결한, 민족적 단합에 위배되는 모든 협정 및 조약을 폐기'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한미동맹을 규정한 한미상호방위조약 등의 폐기를 촉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더불어 남북한으로 구성된 연방공화국을 창설하고, 이 공화국이 중립국가 및 완충지대임을 선언하는 헌법을 채택하자고 제안했다. 또 연방공화국이 단일 국호로 유엔에 가입토록 하자고 북한은 제안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1987년 12월 14일자로 김경원 당시 주미대사가 최광수 외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북측 제안문을 건넨 다음 날 콜린 파월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에게 문서를 검토했는지 물었고, 파월 보좌관은 "아직 검토하지 않았으나 곧 검토할 예정"이라며 "미측은 동건을 내밀히 다루고자 한다"고 밝혔다.
또 1988년 1월 15일자 '장관님 보고사항'이라는 제목의 외교문서에 따르면 미측은 이 제안에 대해 "한국 정부가 다뤄야 할 문제"라며 "북한이 인도적 및 경제적인 분야에서 실재적이고 실현가능한 신뢰구축 조치를 추진할 의사가 없는 한 그런 제의는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미측은 "남북한 대화 재개가 한반도의 평화공존을 향한 선결 조건이라고 믿으며, 미·소 양국정부는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해 상호 균형된 조치를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 것으로 외교문서에 적시됐다.
1987년 12월 15일자로 최광수 장관이 김경원 주미대사에게 보낸 전문에 의하면, 우리 정부는 북한의 제안에 대해 "거창하고 현실성이 없으며,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 새로운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당시 정부는 "모든 남북한 간 문제는 남북 당사자 간 직접 대화를 통해 현실적으로 가능한 문제부터 토의함으로써 실적을 쌓아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그런 견지에서 남북 외무장관 회담을 통해 양측이 희망하는 모든 문제를 협의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방안이라고 정부는 지적했다.
더불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상호 신뢰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북에 의해 일방적으로 중단된 기존 대화의 재개도 필요하다고 정부는 강조했다. 외무부는 이런 입장을 미측에 전달하도록 주미대사관에 훈령했다.
한편, 1988년 1월 15일자 '장관님 보고사항' 문건에 따르면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당시 소련 외상은 북한의 제안이 '비현실적'이라는 미국 측 지적에 대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통일의 실현 및 단일국호에 의한 유엔 가입이 바람직하다"고 언급하고 이를 위한 미·소 협조를 제의했다.
북한 전문가인 김연철 인제대 교수는 1987년 미소정상회담을 계기로 한 북한의 제안에 대해 "내용은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는, 북한의 전통적인 평화제안인데, 미·소, 중·소관계가 개선되려 하는 등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환경이 변화하는 와중에 북한 나름대로 역할을 해보려 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김 교수는 또 "북한은 실현 가능성을 떠나, 지속적으로 미국에 대화의 가능성을 타진했다"며 "남북관계가 열려 있던 때라면 남북 사이에서 제안을 했을 텐데 닫혀 있으니 미국을 통하려 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른 북한 전문가는 "당시는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둔 시점이라 한반도에서 북한의 존재감이 미미하던 때인 데다, 소련의 개혁, 동구권의 불안정한 상황 등 외부 정세가 북한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며 "그런 상황에서 한반도 정세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제안을 한 것일 수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송고시간 | 2018/03/30 02:30
(서울=연합뉴스) 이정진 김호준 홍국기 기자 = 지금처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도 올림픽을 한반도 평화의 계기로 삼으려는 외교적 노력이 전개됐지만 북한의 도발로 실패로 돌아간 사실이 30일 공개된 당시 외교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전후로 한 외교적 노력이 한국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면, 당시에는 미국 레이건 정부가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레이건 정부의 개스턴 시거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1986년 11월 7일 방한, 최광수 외무장관 등을 만나 이른바 '시거 구상'을 제안한다.
같은 해 11월 11일 최 장관이 주미대사에게 보낸 전문을 보면, '시거 구상'은 북한 인사와의 접촉을 일절 금지한 미국의 외교지침을 '제3국 공관 주최 행사에서 미국 관리의 북한 관리와의 인사 교환을 허용'하는 것으로 완화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북한이 남북대화 재개 등으로 화답하면 인도적 교역 등 추가조치를 고려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시거 차관보는 이 제안이 "88올림픽을 앞두고 북한이 초조한 나머지 무력도발을 자행할 가능성을 줄이고 북한을 남북대화의 장으로 유도해 한반도 긴장완화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정부의 첫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당시 최광수 외무장관은 "북한이 남북대화를 중단하는 시점에서 해당 조치는 시기상조"라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 측의 지속적인 요구에 우리 정부는 이로부터 석 달이 지난 1987년 2월 9일 '한국 외교관의 중공 및 소련 외교관 접촉을 위한 미국의 지원' 등을 조건으로 걸고 '시거 구상'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다고 최 장관이 이튿날 주미대사에 보낸 전문에 기록돼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은 2월 말 모든 재외공관에 '대북한 관리접촉에 관한 개정 지침'을 하달했고, 3월 초 당시 중공을 통해 북측에도 관련 사항을 전달했다.
북한은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북한은 1987년 3월 19일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우리는 미국 측의 이런 조치를 긍정적인 것으로 주목하게 된다"면서 "우리는 장소와 형식, 급수의 구애됨이 없이 미국 측 공식인물들과 접촉하여 대화를 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밝혔다.
미국과의 직접대화, 혹은 남북미 3자 대화를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북한이 '시거 구상'을 계기로 이를 거듭 촉구한 것이다.
외무부가 작성한 '시거구상 북한반응 비교' 문건을 보면, 북한은 이로부터 나흘 뒤인 3월 23일 당시 중공(중국)을 통해 ▲ 북미 2자회담 또는 남북미 3자회담 희망 ▲ 5월중 북미 외교당국자 회담 개최 ▲ 올림픽 남북 공동주최 등을 미국에 공식 제안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남북한 당사자 간 회담만이 한반도 문제의 해결방안'이라며 미국이 이에 응하지 않도록 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고, 미국의 방침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 북한의 제의를 거부한다는 입장을 중국을 통해 전달했다.
이후 '북한은 남북대화에 응하고 서울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혀라'는 미국의 입장과 남한보다는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원하는 북한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면서 돌파구가 마련되지 못했다.
미국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1987년 4월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미관계와 관련, "미국은 궁극적인 한반도 긴장완화를 가져올 수 있는 상호적 단계를 개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히는 등 적극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북미 직접교섭을 강하게 반대하는 한편 '시거 구상'을 계기로 호주나 캐나다, 프랑스 등 우방들이 행여나 북한과의 접촉을 확대하지 않도록 견제하는 데 외교적인 노력을 쏟았다.
결국, '시거 구상'으로 북·미 외교관 간에 간헐적인 접촉은 이뤄졌지만, 의미 있는 소통은 없었다. 이후 북한이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을 저지르자 미국은 이듬해 1월 '시거 구상'을 철회했다.
한편 북한은 1987년 7월 23∼25일 일본 사회당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서울올림픽의 남북 공동개최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올림픽시설 공사현장을 방북단에 보여준 것으로 외교문서에서 확인됐다.
다나베 마코토(田邊誠) 전 서기장을 대표로 한 일본 사회당 방북단은 북한이 88 올림픽시설 건설공사를 빠른 속도로 진행하고 있으며, 해당 건설현장에서 관청 직원들과 시민 자원자들이 작업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주일 한국대사관 측에 전했다.
이에 앞서, 북한은 올림픽시설 건설에 필요한 재정·기술지원을 중국에 요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 국무부 한국과 북한담당관은 1987년 6월 미국 주재 중국대사관 관계자와의 면담에서 전해 들은 이 정보를 주미 한국대사관 측에 전달했고, 주한 미국대사는 '북한의 대 중공(중국) 올림픽시설 지원'이라는 제목의 문건으로 보고했다.
당시 미국은 1987년 5월 김일성이 방중했을 때 이런 요청을 했을 가능성이 크며, 북한이 88올림픽 경기의 분산 개최를 매우 진지하게 추진 중인 동시에 필요한 체육시설 건설에 상당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판단했다.
또 북한은 같은 해 6월 9∼13일 평양에서 열린 비동맹회의에 참석한 외국 대표단과의 비공식 접촉에서 88올림픽에서 8개 종목의 경기 개최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으며 올림픽 시설과 선수촌 및 38개의 호텔을 건설 중이라고 언급했다는 정보도 당시 우리 외교당국에 입수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1987년 6월 29일 외무부 국제연합과가 작성한 '평양 비동맹회의 계기 파악 북한 동향 보고'라는 문건에는 이 내용이 싱가포르 외무성 정무국장의 언급이라면서 적시됐다.
transil@yna.co.kr, hojun@yna.co.kr, redflag@yna.co.kr
[외교문서] "87년 中양상쿤 방미시 '美와 무역관계 희망' 北메시지 전달"
송고시간 | 2018/03/30 02:30
양상쿤 "김일성은 신뢰할 수 없는 인물, 北정책 불합리" 비난 정보 입수
(서울=연합뉴스) 홍국기 기자 = 북한이 1987년 양상쿤(楊尙昆) 당시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통해 미국과 제한적이라도 경제·무역관계를 갖고 싶다는 메시지를 미국에 전달했다는 정보가 우리 당국에 입수된 사실이 30일 공개된 당시 외교문서에서 밝혀졌다.
1987년 8월 주일한국대사관이 외무부 장관 앞으로 보고한 문서에는 "양상곤(양상쿤) 중공(중국) 중앙군사위 부주석은 1987년 5월 미국 방문 시 북한의 메시지를 미국 측에 전달했다"며 "동 내용은 북한이 미국과 우선은 제한적이라도 경제·무역관계를 갖고 싶으며, 미국이 북한에 대하여 가하고 있는 각종 제도상의 제한조치를 해제해 주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함"이라는 내용이 적시돼 있다.
이 보고 내용은 당시 주일대사관의 공사가 일본주재 인도대사관 공사와 접촉해 들은 발언 요지라고 문서는 설명했다.
주일대사관은 또 이 문서에서 양상쿤이 방미 기간 미국 고위당국자와의 회담에서 '김일성은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고, 북한의 대내외 정책이 매우 불합리하다'는 점을 강한 어조로 얘기했으며, '중공의 고위 인사가 공개적으로 북한을 그렇게 비난한 것은 처음'이라는 내용도 함께 보고했다.
양상쿤은 이듬해인 1988년 5월 중국의 국가주석에 오른 인물이다. 양상쿤은 국가주석이 된 뒤 1988년 9월 북한의 정권수립 축하차 방북한 데 이어, 1992년 4월 김일성의 80회 생일 축하차 북한을 방문한 바 있다.
아울러 주일대사관은 이 문서에서 "주중 인도대사관의 관찰에 의하면 심양(선양)의 미국 총영사관이 북한과의 접촉 역할을 주로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함"이라고 덧붙였다.
[외교문서] 평창왔던 北김영남, 88올림픽 땐 '보이콧' 외교행보
송고시간 | 2018/03/30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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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지성림 홍국기 기자 = 북한 고위급대표단으로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했던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참가국들의 대회 보이콧을 요청하는 외교행보에 나섰던 것으로 30일 공개된 1987년 외교문서에서 나타났다.
우간다 주재 한국 대사대리는 1987년 12월 4일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에서 본인이 우간다 외무부 정무국 담당관으로부터 탐문했다며 김영남 당시 북한 외교부장이 김일성 특사 자격으로 그해 12월 11일부터 15일까지 우간다를 방문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대사대리는 "동 담당관의 말에 의하면 금번 북괴(북한) 외교부장의 주재국(우간다) 방문 목적은 한국 정치문제를 거론하는 한편 특히 88 서울올림픽 보이콧을 주재국에 집요하게 종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했다.
이후 정보영 당시 주우간다 대사는 1987년 12월 15일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에서 김영남이 예정대로 우간다를 방문해 12월 12일 오전 요웨리 무세베니 대통령을 면담했다고 보고했다.
정 대사는 열흘 후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또 다른 문서에서 우간다 외무부 정무국장으로부터 김영남과 무세베니 대통령과의 면담 내용을 탐문했다면서 그 내용을 보고했다.
정 대사는 '북괴 외교부장 주재국 방문(보고5)'이라는 당시 문서에서 김영남과 무세베니 대통령과의 면담 내용과 관련, "(김영남이) 서울올림픽 (남북) 공동개최 문제가 IOC 및 한국 측의 비협조로 실현이 어렵게 되었음을 설명하고 올림픽 보이콧을 종용하였다고 하며, 이에 대해 무세베니 대통령은 올림픽 참가 문제는 관계부처 간 협의를 거쳐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의 보조를 맞추어 결정하겠다고 말하고, 참가 여부에 대해 직접적인 회답을 회피하였다고 함"이라고 보고했다.
북한은 김일성 집권 시기부터 우간다와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이어왔다. 이 같은 관계를 바탕으로 김영남은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우방인 우간다에 올림픽 보이콧을 부탁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85년 4월 30일부터 3박 4일의 일정으로 말레이시아를 방문한 전영진 당시 북한 외교부 부부장은 말레이시아 외교차관과의 면담에서 "남한은 반민주 군사독재 체제로서 인권유린, 사회불안 등이 만연돼 올림픽 개최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고 말했다는 탐문 결과를 말레이시아 주재 우리 대사관이 장관에게 보고했다.
당시 보고 문서에 따르면 전영진은 "88 올림픽의 서울 개최는 분단고정화 획책"이라며 "남한은 또한 소련 등 동구권 국가들과 외교관계가 없고, 반공정책을 내걸고 있어 사회주의 국가들은 신변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므로 이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도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같은 해 7월 23일에는 인도를 방문한 김봉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 겸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장이 한 공중집회에 참석해 88올림픽의 남북 공동개최, 호칭변경, 남북단일팀 구성 지지를 요청하는 연설을 했다고 당시 주인도 대사가 장관에 보고하기도 한 것으로 나타났다.
1986년 1월 15일에는 함태혁 당시 튀니지 주재 대사가 "북한 체육사절단이 약 3개월 전에 체코를 포함해 동구권 수 개국을 방문해 88서울올림픽 보이콧을 교섭하고 다녔으나, 동구권 국가들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는 당시 체코 대사의 발언을 장관에게 보고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