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영토분쟁, '센카쿠' '북방 4개섬',,,,
그리고 독도
이준규(운영위원)/2005년 3월29일
독도 문제로 한일간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지난 3월17일 한국 정부는 NSC상임위원장인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한일 관계 신독트린을 발표했다. 신독트린은 시마네현의 독도 조례 제정을 ‘제2의 한반도 침탈’로 규정하고, 한일관계의 과거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해 가겠다는 강경한 내용이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이후 한일관계 최대의 위기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북방 4개 섬 문제로 푸틴대통령의 4월 방일 일정 연기
그런데, 최근 일본이 영토문제로 동북아 국가들과 충돌하고 있는 것은 독도만이 아니다. 러시아와는 홋카이도(北海道) 북쪽에 있는 4개 섬(일본에서는 이것을 ‘북방영토’라고 부른다)을 둘러싸고 충돌하고 있으며, 중국과는 센카쿠 열도(중국에서는 댜오위다오라고 부른다) 영유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동북아시아 역내 국가 모두와 영토분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북방 4개 섬' 문제는 전후 일본의 최대 관심사였다. 일본의 거리에서 ‘북방영토 즉시 반환하라’는 플랭카드를 내건 우익단체들의 방송차량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북방 4개 섬에 관한한 일본의 일반 시민들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소련이 무력으로 빼앗았다는 정서가 일반적이다.
'북방 4개 섬' 문제란 홋카이도와 캄차카반도 사이에 있는 쿠릴열도 남단의 하보마이, 시코탄, 에토로후, 쿠나시리 등에 대한 영유권 문제이다. 일본은 이 4개의 섬이 홋카이도에 속한 일본 영토이기 때문에 모두 돌려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 중에서 하보마이와 시코탄은 돌려 줄 수 있지만 에토로후와 쿠나시리는 원래 쿠릴열도에 속하기 때문에 돌려 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북방영토’의 역사는 17-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쿠릴열도와 사할린은 원래 아이누족(아이누족은 지금도 일본에 남아 있는 소수민족이다)이 살고 있던 곳이다. 당시 시베리아를 넘어 동진 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러시아와 홋카이도를 넘어 북상하고 있던 일본이 이 곳을 넘보기 시작했다. 아이누족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러시아와 일본은 1855년과 1875년 두 번에 걸쳐 조약을 체결한다. 1855년에는 쿠릴열도 남단 4개의 섬인 에토로후, 쿠나시리, 시코탄, 하보마이를 일본이 갖고, 쿠릴열도 북부는 러시아가 갖는 대신 사할린은 공동관할로 했다. 그러다가, 1875년에는 사할린을 러시아가 그리고 쿠릴열도는 일본이 갖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북위50도선을 경계로 사할린 남부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1945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자 당시 소련은 사할린 뿐만아니라, 쿠릴열도 남단까지 모두 무력으로 점령해 버렸다. 일제강점기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되었던 조선인들이 사할린에 억류된 것은 이 시기이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일본과 러시아는 ‘북방영토’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는 구소련 시절 일본과 체결한 1956년의 일?소 공동선언을 기초로 시코탄과 하보마이 반환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인 반면, 일본은 1945년 소련이 일본의 패전을 기해 무력 점령했기 때문에 네 섬 모두를 돌려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2001년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일본의 모리 총리는 ‘2개 섬은 반환하고 남은 두 섬은 교섭해 간다’는 획기적인 타협에 이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안은 일본 내 우익과 외무성 일부 관료들, 이익집단들의 로비에 의해 일본이 ‘4개 섬 일괄반환론’으로 급선회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이것이 2002년에 있었던 ‘스즈키무네오 소동’의 배경이 되었다. 타협안을 이끌어 낸 스즈키무네오 의원은 의원직을 사직했고 그의 책사 역할을 한 외무성관료 사토마사루는 배임행위와 업무방해 혐의로 재판정에 서야 했다. 이에 대해서는 와다하루키가 한겨레 2004년 11월22일자 칼럼에서 소개한 바 있다).
특히, 2001년 4월 취임한 고이즈미 총리는 북방영토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고, 2002년 9월에는 현직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북방영토를 시찰해 러시아를 자극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4월로 예정되었던 푸틴 대통령의 방일이 연기되었는데 ‘북방 4개 섬’에 대한 일본의 강경입장 때문인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문제에 관한한 독도와 달리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로 가는 것에 소극적이라는 점이다. 일각에서는 국제사법재판소로 이 문제를 가지고 가서, 2개 섬 반환으로 결정될 경우 일소공동선언을 뒤집고 ‘4개 섬 일괄반환론’으로 급선회한 일본의 입장이 난처해 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현재 이 문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교전국이었던 일본과 러시아의 평화협정 체결의 핵심 의제가 되어 있기도 하다.
해양 권익을 둘러싸고 중국과 충돌하고 있는 센카쿠 열도 문제
일본은 중국과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漁島)의 영유권을 두고 분쟁을 벌이고 있다. 센카쿠 열도는 중국 대륙과 대만, 오키나와 사이 5개의 섬과 3개의 암초로 이루어져 있다. 1997년 11월 영유권을 보류하고 체결된 중?일 어업협정으로 논란이 잦아드는 듯 보였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어 일본의 우익단체들이 등대를 설치하고 이에 항의해서 중국과 대만의 강경 민족주의 단체들이 섬에 상륙해 시위를 벌이는 사건이 계속 일어나면서 갈등이 재발하고 국제적인 ‘화제’가 되고 있다.
센카쿠 열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아 오키나와에 편입시켰다. 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은 강점한 영토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포츠담 선언을 일본이 받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1951년 미국과 체결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센카쿠 열도를 일본의 영토에 포함시킴으로써 논란의 불씨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조약이 독도를 ‘일본이 즉시 반환해야 하는 지역’에 포함시키지 않음으로써 일본이 영유권 주장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중국이 전후 센카쿠 열도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가, 1960년대 말 유엔의 지원 하에 실시된 해저 학술조사에서 센카쿠 열도 인근에 막대한 양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중국과 일본 양국간 영유권 분쟁이 불붙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이라는 국제조약을 통해 ‘정당하게’ 할양받았고, 그 이후 실효지배를 해왔기 때문에 센카쿠 열도에 대한 중국 측의 영유권 주장은 해양자원을 노린 터무니없는 논리라는 것이다. 독도문제와는 반대의 양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독도문제로 인해 우리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분쟁도 본격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3월4일 아사히(朝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일본정부는 주변해역에서의 영유권 분쟁이나 자원전쟁 등에 대한 대응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관계부처 연락회의를 설치하기로 했다고 한다. 또한, 3월15일자 토쿄(東京)신문은 일본 방위청이 중국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센카쿠 열도와 근접해 있는 오키나와현의 섬에 자위대를 주둔시키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렇게 된다면, 일본은 분쟁지역의 최전방에 ‘군’(軍)을 배치하는 것이다. 이 지역의 마찰이 악화된다면 우리로서도 곤란한 상황이 발생한다. 이 지역은 중국과 대만이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분쟁을 벌이고 있는 난사군도(南沙群島)와 함께 중요한 해로(海路)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북아 갈등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바다, 그 중심에 있는 일본
바다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동북아 영토분쟁은 동북아의 복잡다단한 근현대사가 얽혀 있다. 서세동점의 제국주의 시대에 동북아에서 유일하게 열강의 반열에 올라선 일본이 동북아의 패권국가로 부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문제는 청일전쟁 이후 체결된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방 4개섬의 경우 일본이 바야흐로 동아시아의 지역 패권국으로 등장한 러일전쟁 그리고 그 결과 체결된 1905년의 포츠머스조약이 중요한 계기였던 것이다.
또한,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의 고조와 한국전쟁을 계기로 체결된 샌프란시스코조약의 조항들도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센프란시스코 체제).
냉전시기에는 공산진영과 반공진영의 대립구조가 분쟁을 막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냉전구조가 허물어지고 동북아 국가들의 국익추구와 정체성 찾기가 본격화되면서 영유권 분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성공회대 이남주 교수(중국학과)는 이것을 “제국주의와 냉전대립에 의해 규정된 국민국가 경계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고 “국민국가를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정적 결과로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에는 독도,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 북방4개 섬 문제를 포함 동북공정 문제까지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이 다른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무시하는 형태로 드러나곤 한다는 점이다.
일본이 독도를 비롯해 주변국들과 바다에서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배경에 대해서도 여러 분석들이 제시되고 있다. 주변국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관리할 수 없게 된 일본 정치의 유동적 상황을 지적하기고 하고, 해양 자원 확보가 그 배경이라는 해석도 제시되고 있다. 시마네현의 독도의 날 조례제정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집단이 시마네현의 어협(漁協)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사히신문의 3월17일자 사설도 이 문제의 직접적 발단을 일본 어민들의 ‘조업’(操業)에 대한 불만으로 지적하고 있다. 또한 센카쿠 열도는 막대한 석유자원과 관련되어 있고 북방 4개 섬의 경우는 인근 해역의 풍부한 어장과 관련이 있다. 이 지역들이 모두 변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지리적인 전략적 중요성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 일본이 영토문제를 둘러싸고 동북아 국가들과 충돌하고 있는 것은 ‘보통국가론’과 함께 강화되고 있는 일본의 보수우경화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특히, 보수우경화와 함께 강화되고 있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국익추구 외교는 해양자원 확보에 대한 욕구를 증대시키고 있으며 그 토대가 될 군사력의 증강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은 작년 7월에 발표한 방위백서와 12월에 발표한 신방위계획대강에서 중국의 해양진출에 대한 경계감을 드러내면서, 남서지역 섬들의 방위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한 특수부대 설치 등을 제시한 바 있다.
동북아시아는 유럽이나 아메리카 등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역내 국가들이 대부분 바다를 통해 대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북아의 장래는 바다를 둘러싼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따라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그 중심에는 일본이 위치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후 자국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면서’ 공세적인 대외정책을 펼치고 있는 일본의 행보는 동북아시아 정세의 ‘핵’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월간 통일한국 4월호에 기고한 글이다.
일본의 영토분쟁과 동북아 갈등 (0) | 2007.08.26 |
---|---|
북일 요코다 메구미 유골 논쟁(2) (0) | 2007.06.13 |
북일 요코다 메구미 유골 논쟁(1) (0) | 2007.06.13 |
일본의 영토분쟁, 센카쿠 북방 4개섬 독도 (0) | 2007.06.13 |
일본 2004년 신방위계획대강 분석 (0) | 2007.06.13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