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매뉴얼 월러스틴 (By Immanuel Wallerstein)
나는 내 글이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이 희망은 이뤄졌다. 먼저 (먼슬리 리뷰) 편집진의 경험에 바탕을 둔 핵심 주장부터 논하자. 그들은 "자본주의 아래서 효율성 곧 생산성의 장기적인 하락세"를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나도 물론 마찬가지다. 내가 말한 것은 생산비용의 증가에 따른 잉여가치의 장기적 하락세다. 둘은 서로 다른 것이다. 비용증가는 가격 상승으로 해소할 수 없다. 왜냐하면 편집진이 지적한 현실 곧 양극화의 심화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양극화 심화가 나타난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편집진은 마르크스가 죽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마르크스 분석의 핵심 요점 가운데 하나는, 한 체제가 무너지는 것은 사람들이 싫어해서가 아니라 체제 내부 모순의 한계에 도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모순이 어떤 것이며,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상대적인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조정에 왜 구조적 한계가 나타나는지 말이다.
편집진은 "세계의 탈농촌화는 실업 산업예비군의 규모를 더욱 늘려갈 것이다..."고 말한다. 이는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난 50년동안, 전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인구의 대량 도시 유입이 이뤄졌으며 이는 특히 주변주 지역에서 도드라졌다. 왜 이런 일이 생겼나? 그들은 인클로저(울타리치기) 때문에 농촌에서 �겨난 것이 아니다. 도시의 여건이 아무리 끔찍할지라도 그래도 농촌보다는 더 잘 살기 때문에 도시로 모여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스페인어 지역(barrios)과 빈민가(favelas)에서 사람들이 일자리를 못찾아 노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이 실업자라는 것은 노동통계청의 고용 개념을 이용할 때만 그렇다. 그들은 비공식 경제 부분에서 일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분석가들이 최근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충분히 잘 살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건 공식 부분에서 채용하겠다고 하면 이 "예비군"들은 50년이나 100년전 노동력의 실질 임금보다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한다. 내가 임금 수준이 높아진다고 하는 것은 이런 뜻이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임금 상승의 나머지 절반은 간부의 임금이다. 그들은 과거에는 숫자가 적었고 상대적으로 보수를 적게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전체 노동인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으며 과도한 임금을 받는다. (최고경영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결과는, 여피족과 최고경영자들이 아주 잘 살지만, 기업의 이윤은 줄어드는 것이다.
과거에는 국가권력을 놓고 투쟁을 벌였지만 지금은 세계체제를 놓고 투쟁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400년동안의 투쟁은 세계체제 전반을 둘러싼 것이었다. 그런데 체제 변혁을 열망한 운동전략이 국가 구조를 장악했고 이 국가 구조를 세계체제 변혁에 이용했다. 이 전략을 가장 분명하고 효과적으로 밝힌 이가 바로 레닌이다. 분석가로서 마르크스가 아직 살아있다면(또는 살아있을지라도), 전략가로서 레닌은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레닌의 전략을 수용하는 중요한 운동이 지금 어디있는가. 한번 제시해보라.
내가 1968년을 세계 혁명이라고 한 것은, 구좌파의 전통적인 (목표가 아니라) 전략에 대한 세계 대중의 환멸을 말한 것이다. 레닌의 전략과 베른슈타인(Bernstein), 카우츠키(Kautsky)의 독일 사민당 전략은, 레닌이 주장한 바 (그리고 기대한 바)에 비해 훨씬 차이가 적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전략은 국가구조 통제권의 장악에 너무 많이 의존했고, 통제권을 쥔 이후에는 그것을 지속하는 데만 너무 의존했다. 특히 무엇보다 통제권을 유지하려고 하니, 즐겁게 노래 부를 내일이 있으니 오늘의 현실을 인내하자고 모두에게 강요하게 된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탈정치화를 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전략은, 국가 주도의 개혁운동이 (그렇다, 공산주의 국가는 국가주도의 개혁운동을 시도했다) 먹혀들어가서 정권이 세계변혁을 진정 이룰 것이라고 인민들이 믿을 때만 유효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세상을 변혁시키지 못했다고 믿으며, 먼슬리 리뷰 편집진도 (그들은 현재 상태에 대해 나보다 더 비관적이다)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의 민중(masses)(이 말을 기억하는가?)이 이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 50년동안 더 민주적이고 평등한 세상을 원하는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간의 무제한의 투쟁이 벌어질 것으로 나는 예상한다. 이 둘 사이에는 공감대가 전혀 없다. 그러나 물론 첫번째 세력에 속하는 이들간의 연합을 형성하는 시도는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레닌식의 단일하고 규율에 복종하는 운동의 틀에 이들을 꿰맞추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유주의 중도를 신뢰하지 않는다. 도리어 정반대다. 내가 말한 것은 `자유주의 중도가 자신들의 이념적 선호를 충실히 이행하도록 만드는' 시도를 하자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다른 말이다. 요점은 자유주의 중도가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점을 꾸준히 제기해야 한다. 창피를 당한 뒤 자신과 세계에 대해 정직해진 자유주의 중도는 자신들의 이론적 선호를 충실히 이행하려고 할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실천하지 않겠지만. 또 나는 반독점(반트러스트)을 위한 행동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게 뭐든 나는 그걸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점은 자본주의 또는 `후기 자본주의'의 특별한 경향이 아니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심장이며 영혼)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말이 없다? 독점과 인종주의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는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요소이며 16세기말 탄생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유지한 것이다. 따로 떼어내 논할 정도로 특별한 쟁점은 아니다. 이는 나의 기본 전제에 해당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엇으로 이행인가? 먼슬리 리뷰 편집진은 "세계가 좀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지는 방향으로 이행할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비록 가능성을 반반으로 보지만. 그것이 바로 내가 하려는 말이다. 체제의 구조적 위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분기점이 나타난 것이다. 이 체제는 계속 유지될 수 없으며 다른 것으로 대체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 이행이 이뤄질지는 전적으로 불확실하다. 본질적으로 행동의 모든 세세한 변수를 미리 알아 계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각각의 작은 변화가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래서 결론은,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단순한 가능성이나 내재적인 가치가 아니라 승리의 확실성이라는 생각을 포기할 때만 이는 가능하다. 또, 한번 전세계에서 극적으로 실패한 전략이 되살아나서 다시 한번 작동하기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앉아있지 않을 때만 이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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