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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읽기](12) 리영희의 ‘대화’

문화읽기

by DemosJKlee 2009. 2. 2.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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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읽기](12) 리영희의 ‘대화’

이권우 | 도서평론가경향신문
  • ㆍ반항기 짙은 ‘사상의 은사’ 참됨 좇아 화두를 던지다

    자서전을 쓰고 나서 전문가들한테 상찬받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자기 삶을 미화했다고 비난받기 일쑤고, 문제적인 대목을 충분히 해명하지 않고 넘어갔다고 욕먹기 십상이다. 더욱이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다른 누군가가 써주는 천박한 자서전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경우, 널리 인정받는 자서전을 만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다행히 예외가 있으니, 리영희의 자서전이 그렇다.

 

 

리영희의 자서전은 두 권이다. 첫 권은 1988년 나온 <역정>(창비)이다. 일제 식민기를 보낸 소년시대부터 이승만 정권말기에 이르는 삶을 회고한다. 이 자서전은 잡지에 연재된 바 있는데, 당시에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이러한 글을 문학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문학관은 옹졸하고 편협한 것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두 번째 권은 2005년 나온 <대화>(한길사)이다. 앞의 자서전을 전사(前史)로 해서 자신과 삶과 사상을 되짚어보고 있다. <대화>는 대담 형식으로 쓰여진 자서전이다. 건강이 나빠져 집필이 어려워지자 문학평론가 임헌영씨와 대화를 나누고, 이를 정리했다. 이 책 역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리영희를 비판한 윤평중도 “자서전 문화가 척박한 우리 문화지형의 질곡을 일거에 깨트린 쾌거인” 역저이며, “자화자찬만이 넘쳐나는 불모의 다른 자서전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며 높이 평가했다.

<대화>에는 꿈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리영희는 자신의 삶과 우리 민족의 역사를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빗대어 분석한다. 의외라고 여길 이들도 많을 텐데, 그만큼 그의 사상적 프리즘이 넓다는 뜻이다. 리영희에게는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무의식을 형성한 계기가 되고, 융에 기대면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의식의 역사’가 되는 사건이 둘 있었다. 그 하나는 외삼촌인 최인모가 1920년대초 일본 유학을 갔다 돌아와 소작인들에게 땅을 나누어준 사건이었다. 다른 하나는 외할아버지 살해사건. 머슴이었던 문학빈이 독립군으로 변신, 외할아버지에게 독립자금을 늑탈하려다 벌어진 사건이었다. 정말,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에게는 평생 한이 되었을 사건이 그에게는 올바른 삶의 표본이 되었으니 말이다.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주변의 만류와 협박도 드세었다. 일본에 가 자유주의적이고 선진개혁적인 사상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숱하게 많았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자발적으로 이른바 농지개혁을 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외삼촌은 앎과 함의 일치를 실천했다. 선각자의 삶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여겼던 것이리라. 사회계급으로 보자면 문학빈은 외삼촌의 대척점에 있다. 그럼에도 “혁명가이자 독립투사의 계급적 각성과 사회혁명”을 실천했다. 비록 나중에 변절해 아쉽지만, 민중의 성장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사례라 여긴 듯싶다. 두 사람에 대한 평가에서 볼 수 있듯, 리영희의 사상적 유전자는 반항아 기질이 짙다. 참된 것 앞에 부나 혈연이 무슨 상관이냐는 이 정치적 무의식은 리영희의 파란만장한 삶을 예고한다.

그는 자신의 삶을 다섯 가지의 꿈으로 유형화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정말 리영희의 삶이 그러했구나, 라며 주억거리게 된다. 자신의 삶을 인상적으로 요약할 줄 아는 사람이 뛰어난 자서전의 저자가 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첫째는 행복했던 유년시절이 꿈속에 재현되는 경우다. 한반도의 변방이었으나, 금광 덕에 풍요로웠던 대관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황금시대였다. 더욱이 그는, 부계는 압록강변의 제법 이름난 선비집안이었고, 모계는 벽동 최부자집이었다. 그에게서 식민지 소년의 우울한 초상을 발견할 수는 없다. 두 번째는 결핍의 고통이 재현되는 꿈이다. 월남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 때까지 ‘동물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발버둥쳤다. 세 번째는 정서적 상흔이 빚어낸 꿈이다. 전쟁 한복판을 관통하면서 20대 청년이 입은 영혼의 상처가 재현된다. 네 번째는 굴욕과 괴로움이 등장하는 경우다. 이성의 힘으로 우상에 도전한 것이 죄가 되어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족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비굴하게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꿈”이다. 다섯째는 권력의 탄압이 꿈으로 생생하게 나타난다. 걸핏하면 쫓기다 잡히는 악몽을 꾸었다. “이런 고생을 끝없이 되풀이해야 할 바에는 차라리 자살을 해버리는 것이 낫겠다”며 깨어났단다.

<대화>에는 상당히 도전적인 논쟁거리가 담겨 있다. 대담자인 임헌영도 “난감한 쟁점”이라 말할 정도다. 융의 표현에 빗대면 민족심리학이 될 터이고, 리영희 스스로 민족적 유전자라 이름 붙였는데, 내용은 이렇다.

그는 우리 역사를 볼 적에 결정적인 순간, 분열과 대립으로 비극이 되풀이된 경우가 많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일제시대 민족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대립·분열한 것은 물론이고 각 진영의 내부도 적대관계에 놓였다. 작은 이익에 매몰되어 대의를 잃은 경우다. 1960년이 그러했고, 1980년에도 그러했다. 이런 작태는 조선시대에도 나타난다. 숱한 사화, 당쟁, 분당, 족벌정치라는 폐단이 있었지 않은가. 수백년에 걸쳐 비슷한 현상이 반복되는 것을 보며 “이것이 한국(조선)인의 민족성을 형성하게 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노라고 말한다. 비판하는 처지에서 보자면 식민사관의 재판이며 자학적인 민족관이라 할 만한 발언은 또 나온다. 그는 광적인 반공주의나 극우적 사고방식을 지닌 집단이 북한과의 군사대립을 부추기는 현상을 지적하며 “어쩌면 남한만을 말할 때의 민족성 같은 것이 냉혈적이고 잔인함의 어떤 유전적 요소를 지니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고 고백한다.

리영희의 민족비판은 방향을 바꿔 다시 제기된다. 강력한 지배권력이 있어 통제력이 강하게 작용할 적에는 분열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일례로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협의체를 구성하려 했을 때를 든다. 북한은 단일권력체제가 자리잡아가는 과정이었는지라 내부에서 분열하거나 대립하는 현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남한의 경우는 그러지 않았다.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상태가 보장되자 정당단체만 해도 300여개로 세포분열했다. 그는 우리 민족이 과연 “자율적 자기규제 능력과 슬기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4·19 이후의 혼란도 이 입장에서 재론된다. 지배권력이 막강할 때는 평신저두(平身低頭)하지만, 정권이 자유를 주면 “돌변해서 제각기 자기 주장대로 행동”한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한국민중에게 민주주의적 책임성이 없다는 것이 문제요.”

리영희의 민족비판은 전방위에 걸쳐 있다. 권력욕에 눈멀어 사분오열하는 엘리트집단에서 시민적 자율성과 책임성이 결여된 민중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자서전 읽기는 이 대목에서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는 민족에 대한 애정이 없고 민중을 불신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그를 비난하는 것이 마땅한 것인가. 루쉰 이야기가 장황하게 나오는 이유가 이런 오해와 편견을 막기 위해서였으리라. 리영희가 루쉰을 얼마나 존경하는지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민족에 대한 비판이 루쉰이 걸어간 길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노신은 당시의 중국 인민대중의 무지·나태·우매·탐욕·교활·갈등·분열·약육강식 등등의, 민족적 결점과 약점을 미화하거나 은폐하거나 합리화하거나, 심지어 정당화하는 따위의 값싼 ‘과잉민족지상주의’를 거부해요. 그 모든 약점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그것을 중국 인민대중의 눈앞에 잔인하리만큼 적나라하게 던져 보여주었어. 노신이 의도한 바는 그런 자신의 약점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또는 인식한다 하더라도 민족적 편애심 때문에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자기기만적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비난하는 거요.”

개인적으로는 리영희가 우리에게 던진 의미 있는 토론거리라 생각한다. 그의 민족 유전자론은 근거 있는 주장인가. 민족의 아픈 생채기를 굳이 들춰보아야 하는 것일까. 정말, 그런 기질이 있는 거라면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을까. 할 말이 많은 주제다. 그럼에도 우리 지식사회는 이 질문을 두고 깊이 있는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상논쟁을 벌였을 뿐이다.

리영희에 대한 비판은 중국의 문화혁명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리영희의 이념좌표를 소박한 인본적 사회주의라며 맹렬한 비판을 시도한 윤평중이 대표적인 경우다. 리영희는 <대화>에서 일부의 비판을 알고 있노라며 스스로 변호하는 발언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왜 중국혁명에 관심을 기울였는지 소상히 밝힌다.

그는 중국혁명에서 희망을 본 듯하다.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나 소련의 관료주의적 공산주의를 극복한 제3의 사회제도로 중국 공산당을 눈여겨 본 것이다. 중국혁명을 이처럼 높이 쳐준 것은 “민중적 공감과 인민대중의 적극적이면서 자발적인 참여가 활발”했기 때문이다. 문화혁명에 대한 관심은 “무조건적 공감이나 편애 때문”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사회의 병든 생활방식과 존재양식에 대해서 대조적인 삶의 모습을 제시”하고 싶었노라 해명한다. 그렇다면 홍위병으로 상징되는 문화혁명의 폐해가 드러나고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상황에서 리영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다시 사뭇 논쟁적인 문제의식을 만난다.

“결론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결한 사회주의도, 사회주의적 요소를 결한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로 비인간적 제도라는 신념이 굳어졌어요. 인류의 한 발달 단계로서는 부족한 대로 ‘북구라파식 사회민주주의’가 현실적 선택이라고 생각했지.”

홉스봄이 말했듯, 지난 20세기는 극단의 시대였다. 리영희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 한쪽은 “하반신적 욕구우월주의”로 팽배했고, 다른 한쪽은 “상반신적 도덕우선주의”가 득세했다. 두 진영의 대결과 반목은 전쟁과 혁명을 나으며 인류를 도탄에 빠트렸다. 균형이 무너지자 시장논리가 세계를 장악했고, 지금 그 종말을 지켜보고 있다. 이제 비로소 우리는 중용의 길에 들어서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리영희는 오늘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일까. 사회민주주의를 주목하자고 말해놓았으니.

이 문제의식도 우리 지식사회가 깊이 있게 토론하지 않고 있다. 말로만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라 할 일이 아니다. 그는 과거의 은사만이 아니라 미래의 은사이기도 하다. 경험에 바탕하고 상당 부분 수사학적 묘사에 그친 그의 지향점을 화두 삼아 더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한다. <대화>는 새로운 시대정신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

<대화>에는 꿈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리영희는 자신의 삶과 우리 민족의 역사를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빗대어 분석한다. 의외라고 여길 이들도 많을 텐데, 그만큼 그의 사상적 프리즘이 넓다는 뜻이다. 리영희에게는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무의식을 형성한 계기가 되고, 융에 기대면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의식의 역사’가 되는 사건이 둘 있었다. 그 하나는 외삼촌인 최인모가 1920년대초 일본 유학을 갔다 돌아와 소작인들에게 땅을 나누어준 사건이었다. 다른 하나는 외할아버지 살해사건. 머슴이었던 문학빈이 독립군으로 변신, 외할아버지에게 독립자금을 늑탈하려다 벌어진 사건이었다. 정말,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에게는 평생 한이 되었을 사건이 그에게는 올바른 삶의 표본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권우 |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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