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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스크랩]미국의 정책싱크탱크

기고와 메모, 스크랩 등

by DemosJKlee 2009. 6. 27.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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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킹스·헤리티지·CAP … 정부에 아이디어 주고 쓴소리 하는 ‘제 5권부’

 

 

 

싱크탱크(Think Tank)를 빼고는 미국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싱크탱크는 말 그대로 연구자 집단이다. 그러나 단순히 연구만 하는 게 아니다. 현실정치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있다. 이념이 맞는 정부가 들어서면 싱크탱크 연구원이 대거 정부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렇다고 정당 소속은 아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정당을 이념적으로 견제한다. 워싱턴에만 이런 싱크탱크가 300여 곳이나 있다. 이들이 매일 쏟아내는 수백 건의 보고서와 세미나는 미국 정부 정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 때문에 싱크탱크를 ‘제5의 권부’라고도 부른다. 미국 싱크탱크와 정치의 상관관계를 집중 조명해 본다.

정경민 기자


http://news.joins.com/article/aid/2009/06/22/3404122.html?cloc=olink|article|default

미국진보센터(CAP)의 존 포데스타 소장

 

지난해 11월 5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정권인수팀 명단이 공개되자 워싱턴 정가는 술렁거렸다. 인수팀장으로 지명된 사람이 2003년 설립된 싱크탱크(Think Tank) 미국진보센터(CAP)의 존 포데스타 소장이었기 때문이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다고는 하나 포데스타는 설립한 지 채 5년도 안 된 새내기 싱크탱크 수장에 불과했다. 더욱이 인수팀의 인사담당도 CAP 연구위원인 카산드라 버츠가 차지했다. 그는 오바마의 하버드 로스쿨 동창이기도 하다. CAP엔 오바마의 정치적 스승이자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낸 톰 대슐 전 상원의원도 있었다. 신생 싱크탱크였던 CAP는 오바마의 당선 이후 하루아침에 신데렐라로 거듭났다.

CAP의 부상은 워싱턴 정가의 지각변동을 의미했다. 대통령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싱크탱크는 인재 공급처 기능도 하기 때문이다. 워싱턴 정가에선 이런 광경이 낯설지 않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에서 시작해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 민주당 대통령 시절엔 브루킹스연구소가 풍미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는 헤리티지재단이 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미국기업연구소(AEI) 출신을 대거 발탁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右)이 브루킹스연구소에서 열린 회의에서 한 기업인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전국 1500개 … 이념 색깔 뚜렷, 정계도 진출

미국의 싱크탱크는 단순히 연구만 하는 집단이 아니다. 반쯤은 정치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아이디어를 팔기 위해 정치인이나 언론에 의도적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겉으론 초당적이라고 내세우지만 대개 이념 색깔이 뚜렷하다. 이념이 맞는 정권이 들어서면 입각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싱크탱크를 입법·사법·행정부와 언론에 이어 제5의 권부(權府)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부 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그러나 재정적으로는 대부분 정당·기업으로부터 독립했다. 싱크탱크가 정당·기업을 향해 쓴소리를 할 수 있는 힘도 여기서 나온다.

싱크탱크 간의 경쟁도 치열하다. 미국엔 1500개가 넘는 싱크탱크가 있다. 이 중 300개 정도가 워싱턴 듀폰 서클에서 매사추세츠가에 이르는 ‘싱크탱크 거리’에 포진해 있다. 매일 수십 건의 세미나가 이곳에서 열리고 수백 건의 논문이 쏟아져 나온다.

정부 성향 따라 힘 커져 … 치열한 경쟁

현대적 싱크탱크의 효시로는 브루킹스의 전신으로 1916년 설립된 정부연구소(IGR)가 꼽힌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정부가 전시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출범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뒤 IGR은 브루킹스로 거듭났다. 그러자 보수진영이 바짝 긴장했다. 특히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르며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정부가 종전 후에도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이에 의기투합한 존 볼턴 등 보수파 학자들이 43년 AEI를 설립했다. AEI는 76년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을 특별연구원으로 채용하며 보수를 대표하는 싱크탱크로 부상했다.

64년 대통령 선거는 기세가 오르던 보수진영에 찬물을 끼얹었다. 기대를 모았던 공화당 배리 골드워터 후보가 민주당 존슨 후보에게 참패한 것이다. 충격에 빠진 보수진영은 패배의 원인을 놓고 고심했다. 그 결과 진보진영의 브루킹스와 같은 영향력 있는 보수 싱크탱크가 절실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서 탄생한 게 73년 헤리티지재단이다.

헤리티지는 아이디어 마케팅 개념도 도입했다. 제조업체가 물건을 홍보하듯 싱크탱크도 아이디어를 대중에게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헤리티지는 예산의 20~30%를 홍보에 쓴다. 80년 대통령이 된 레이건은 헤리티지에 날개를 달아줬다. 레이건 정부의 전략방위구상이나 감세를 골자로 한 공급경제학이 모두 헤리티지에서 나왔다.

레이건 정부 때 헤리티지에 밀렸던 AEI는 2001년 조지 W 부시 정부가 출범하자 전세를 역전시켰다. AEI 이사회 부회장이었던 딕 체니가 부통령으로 임명되자 AEI의 ‘네오콘’이 줄줄이 부시 정부에 진출했다. 레이건 이후 보수의 기세에 눌렸던 진보진영도 절치부심했다. 클린턴의 비서실장이었던 포데스타는 클린턴조차 보수 싱크탱크가 만들어 놓은 의제에 휘둘려 진보의 정체성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이대로 둬선 진보이념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가 만든 게 CAP다. CAP는 70년대 이후 진보 색채가 옅어진 브루킹스나 진보정책연구소(PPI)를 대신해 진보진영 대표주자로 떠올랐다.

국제관계·환경·가족 등 특정분야만 다루기도

예산 기준으로 덩치가 가장 큰 곳은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에 본부를 둔 랜드사다. 2차 대전 후 미 공군이 국방과학 연구를 위해 설립했다. 지금도 랜드는 정부로부터 의뢰받는 프로젝트가 많다.

브루킹스·헤리티지·CAP처럼 전방위 정책을 다루는 종합 싱크탱크도 있으나 국제관계나 환경·가족·범죄와 같은 분야에 특화한 싱크탱크도 있다. 국제관계에선 전략 및 국제문제연구소(CSIS)와 외교위원회(CFR), 국제평화를 위한 카네기 기금이 대표주자다. CSIS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를, CFR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배출했다. 오바마 정부 등장 후엔 CAP와 함께 신미국안보센터(CNAS)가 급부상하고 있다. 2007년 설립된 CNAS엔 클린턴 정부 시절 외교·안보 고위직을 지낸 인물이 많이 포진했다.



한국에서는 정부·정당·기업 연구소 떴지만 ‘민간’은 아직

한국에선 미국과 같은 싱크탱크가 자라지 못했다. 무엇보다 권위주의의 잔재가 남아 정부에 맞서는 보고서를 낼 여건이 안 됐다. 정치권도 미국식 싱크탱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세계대전 후 미국 정가에선 정책 대결이 본격화했다. 보수와 진보가 정책 차별화에 열을 올렸다. 싱크탱크의 역할이 커진 건 그 덕분이다. 이와 달리 국내에선 지역 대결 구도가 강했다. 정당 간 정책의 차별성은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정치이념을 대변하는 싱크탱크가 설 자리가 없었다.

인재와 정보를 독점한 강력한 관료집단의 존재도 외부 싱크탱크의 필요성을 약화시켰다. 미국의 싱크탱크는 정부의 전문성 부족을 메워주며 성장했다. 그러나 국내에선 관료집단이 다른 어떤 곳보다 인재와 정보를 더 많이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싱크탱크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다. 국내 싱크탱크는 먼저 정부 주도로 설립됐다. 한국개발연구원(KDI)·금융연구원·외교안보연구원 등이 대표적이다. 국책연구소의 한계상 연구보고서는 대부분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내용에 그쳤다.

지방자치제가 도입된 뒤에는 지방정부도 앞다퉈 연구소를 설립했다. 서울을 비롯한 거의 모든 광역 지자체가 자체 연구소를 거느리고 있다.

1980년대 들자 기업들도 연구소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삼성·현대·LG·대우 등 대기업들이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기업 입장을 대변하는 보고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2005년 정당법 개정으로 정당이 받는 국고보조금의 30% 이상을 정책연구소에 지급하도록 규정이 바뀌자 정당도 자체 연구소를 두고 있다. 최근엔 정부·정당·기업에 속하지 않은 시민단체나 개인연구소도 등장했다. 그러나 아직은 영세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국내 싱크탱크의 장래는 밝다. 무엇보다 정치권에서 보수와 진보의 정책 차별화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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