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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시론> 진보정치와 이재영의 염원

진보정당 및 진보정치

by DemosJKlee 2012. 12. 17.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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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진보정치와 이재영의 염원

입력 : 2012-12-17 20:53:00수정 : 2012-12-17 20:53:00


 

겨울 산자락에 그를 묻고 왔다. 갓 심은 어린 소나무 아래에. 진보운동가 이재영은 그리 돌아갔다. 자신의 ‘삶을 닮은 죽음의 자리’로. 그는 진보정치를 위해 ‘자양분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산등성이 푸른 수목 한 그루를 키워낼 흙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의 돌아감 앞에서, 또 대선을 하루 앞둔 오늘, 내 자신에게 ‘판단정지’ 명령을 내렸던 작금의 진보정치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재영이 그와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전력을 다해 키우고자 했던 진보정치의 현재는 어둡다. 진보정치 세력은 19일 치르는 대통령 선거에서 유권자들에게 ‘어엿한’ 대통령 후보로 인정받는 ‘단일후보’ 하나 만들어내지 못했다. 1997년 대선 이후 15년 만의 일이다. 정파갈등과 분당 사태의 반복 속에 진보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름의 정당만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진보신당 등 3개이고, 그들 간의 갈등의 골은 여전히 심한 데다가, 정당 지지율은 이들 정당 모두 합쳐도 3%가 안되는 실정이다. 그런 가운데 진보정치 세력이 독자적으로 존립해갈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이 팽배해 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은 안철수라는 개인 명망가로 모아졌고, 진보정치 세력은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별다른 미래 비전과 새로운 목표의 공유도 없이 민주통합당의 ‘하위파트너’가 되거나 존재감 자체를 상실하였다.

그럼 이제 진보정치의 미래를 위한 통로는 차단된 것일까? 이재영은 생전에 ‘때이른 침체의 길’에 접어든 진보정치를 보며 일갈한 바 있다. “자주적이지 못한 자주파와 평등하지 못한 평등파가 문제”라고. 민주노동당 양대 세력이었던 자주파와 평등파가 각기 자파의 이념과 패권을 우선하며 ‘당내 정치’에만 몰두한 나머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계급 (내) 평등의 진작은 물론, 당장의 민생을 개선하는 데에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나는 그에 착안해 진보정치의 ‘중흥’의 길이 ‘의제투입의 정치’를 넘어 국민의 다수를 이루는 서민의 삶의 질 향상에 실질적인 성과를 내는 ‘책임정치’의 구현에 있다고 본다. 이를 위해선 현실과 보유 자원에 대한 냉철한 분석에 바탕해 집합적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는 이념과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기반을 둔 과감하고 유연한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이는 진보정치 세력이 침체에 빠진 약체 군소정당의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제도정치 영역 내부에 터잡은 세력으로서 자신을 바라볼 때, 그래서 ‘진보의 재구성’이 아니라 ‘사회의 재구성’을 우선할 때 가능한 일이다.

진보정치의 생존 그 자체만을 내세우고, 기존의 ‘소수 결사’ 방식을 반복해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돌아가기 얼마 전의 그를 보러 갔을 때였다. 그가 통증을 참으며 함께 간 지인에게 말했다. 보좌하고 있는 ‘진보정치인’의 건강을 잘 챙기라고. 그는 진보정치에 ‘하나 남은 소중한 밑천’이라고. 난 이재영 스스로가 떠나보냈다고 말하기도 했던 그 밑천이 진보정치를 책임정치세력으로 키워내길, 그래서 이재영의 ‘처음과 같던 마지막 염원’처럼 진보정치가 제대로 선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선진 민주국가의 경험이 그러하듯, 경제민주화와 정치발전을 위해선 보수정치를 견제하고 정상화시킬 진보정치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체제의 전환’을 가져올 보수-진보의 대타협도 진보의 성장이 전제될 때 가능하다.

진보정치 ‘부활의 날’을 가상하며, 카뮈가 ‘진실의 밤’이라는 글을 통해 앞서간 레지스탕스 동지들을 기렸던 말을 간추려, 돌아간 이재영과 그를 추모하는 ‘남겨진 진보운동가’들과 나누고자 한다.

“아직 우리에게는 모진 투쟁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갈라진 땅, 희망과 추억으로 고문당한 이 가슴속에 평화가 올 것이다. 행복이, 올바른 다정함이 그 나름의 시절을 맞을 것이다. 이 평화에도 불구하고 늠름하던 위대한 우정이 마음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부디 죽은 우리의 동지들도 이 숨찬 밤 속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평화를 그들의 것으로 간직하기를.”

<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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