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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일 동맹' 일제 식민지배 ‘1905년 체제’의 부활?

기고와 메모, 스크랩 등

by DemosJKlee 2023. 11. 18.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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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일 동맹' 일제 식민지배 ‘1905년 체제’의 부활?

  •  한승동 민들레 에디터
  •  승인 2023.10.15 09:20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514

1905년 체제에 올라탄 윤석열 정부

캠프 데이비드 합의는 ‘1905년 체제 2.0’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 목적은 일본 지키기

한반도 평화체제 시도 무너뜨린 일본

핵오염수 해양 투기도 1905년 체제의 산물

12일 오전 부산작전기지에 미국 핵 추진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함(CVN-76)이 입항하고 있다. 레이건함 등 제5항모강습단 입항은 한미 확장억제의 차원이며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우호 협력 제고를 위한 것이라고 국방부는 설명했다. 2023.10.12. 연합뉴스

 

“일본과 일본에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조선(적어도 그 남부, 즉 한국), 대만이 권력의 뒷받침에 의해 같은 진영에 장악되어 있는 극동지역 질서.”   지난해 5월에 일본에서 출간된 지지와 야스아키(千々和泰明)의 <전후 일본의 안전보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 책은 이 질서를 ‘극동 1905년 체제’라고 불렀다.

 

극동 1905년 체제

 

1895년 청일전쟁으로 대만을, 1905년 러일전쟁으로 조선을 복속시킨 일본은 ‘동아시아의 힘의 공백’을 메워 제국의 기본토대를 구축했다.  그것이 바로 ‘극동 1905년 체제’(이하 ‘1905년 체제’)다.  지지와는 일본의 패전으로 이 토대는 무너졌으나 일본을 대신해 이들 지역을 장악한 미국에 의해 1905년 체제는 새로운 형태로 부활했다고 봤다.  새로운 형태란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이며, 이 두 동맹은 미국을 매개로 연결된 사실상 하나의 실체다.  바꿔 말하면 오늘날의 한미동맹, 미일동맹의 뿌리(기원)이자 원형은 본격적인 일본제국의 출발점인 1905년 체제라는 얘기가 된다.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보장해 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1905년 7월에 체결된 것도 1905년 체제가 지닌 그런 의미를 더 강화시킨다.

 

2일 미국 이지스구축함 랄프존슨함이 서귀포시 제주해군기지에 입항해 있다. 미 이지스구축함 랄프존슨함은 군수 적재와 승조원 휴식차 이날 입항했다. 한미 해군은 랄프존슨함 입항을 계기로 연합방위 태세를 강화하고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해 교류 협력 활동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해군 7기동전단이 전했다. 2023.10.2. 연합뉴스

 

제1 열도선, 애치슨 라인과도 겹쳐

 

1905년 체제의 영토 개념에는 쿠릴열도에서 일본, 조선, 그리고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에 이르는 바다와 땅들이 들어가는데,  정확하게 일치하진 않지만,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중국이 다투는 세력권 개념으로서의 제1 열도선(도련선) 아래쪽(태평양쪽)의 땅, 바다와 거의 겹친다.  이는 메이지 이후 제국주의 영토 침략, 확장으로 나아간 근대 일본의 출발점이었다.  한국전쟁(6.25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인 1950년 1월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동북아시아에서의 미국 극동방위선이라고 발표했다는 ‘애치슨 라인’과도 거의 겹친다.

 

이 선은 또한 근대 일본군의 창시자이자 일본육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슈번 출신의 메이지 시대 실력자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얘기한 주권선(主權線), 이익선(利益線)과도 상통한다.

 

지지와에게 이 1905년 체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조약, 한국전쟁과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이어지고, 다시 1965년 한일협정 체제로 연결된다. 

 

그리고 2023년 8월의 캠프 데이비드 체제도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요체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서 교두보 역할을 하는 ‘기지국가’(base-state) 일본의 안보와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는 체제라는 점이다. 그것은 곧 미국의 이익 극대화로 연결된다.  이 기지국가와 쌍을 이루는 개념이 ‘전초(최전방)국가’(outpost-state)다.  분단된 한반도 남쪽,  즉 한국이 바로 전초국가다.

 

22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건군 75주년 국군의 날 최종 리허설에서 이 진행되고 있다. 2023.9.26. 연합뉴스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 목적은 일본 지키기

 

지지와 야스아키가 당시 방위연구소 전사연구센터 안전보장정책사연구실 주임 연구관으로 있을 때 <브리핑 메모> 2021년 7월호에 쓴 ‘미일 한미 양동맹과 극동 1905년 체제-샌프란시스코 강화 미일 안보 70년째의 시점’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1950년 6월 25일에 조선(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한국 그 자체가 아니라 냉전 하의 대소련 봉쇄정책에서의 일본의 중요성 때문에 조선전쟁에 유엔군으로 개입(이때의 방위 커미트먼트[약속]가 1953년 10월 1일에 한미동맹으로 발전한다)했으며, 조선전쟁 개입을 통해서 일본 기지의 전략적 중요성을 실감했다. (그것이 미일동맹으로 발전한다)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은 말하자면 ‘쌍둥이 동맹’(블로그 주인  강조)으로 성립된 것이다.”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은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지지와의 인식은 일본 보수우파 주류들이 공유하는 인식이고,  이는 2차 대전 이후 동아시아 질서 재편기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미국 주류도 공유하는 인식이다.  2차 대전 뒤 연합국이 전범국 독일을 분할 점령했듯이 전범국 일본을 분할점령하자고 소련은 주장했으나 미국은 엉뚱하게도 전범국 일본이 아니라 그 피해국 조선을 분할해 절반을 소련에게 넘겼다.  그것이 지금에 이르는 한반도 분단역사의 출발점이었다.  소련 등은 당연히 홋카이도 또는 혼슈를 분할점령하자고 했으나 미국은 일본을 자국이 독점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조선을 분할해 북쪽을 소련에게 넘기고 남쪽은 일본을 지키는 전초기지, 전초국가로 삼았다.

 

지지와의 글은 당시의 그런 역사와 역사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21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해군 2함대-미2사단 연합 해상 실사격 훈련'에 참여하는 미2전투항공여단 4-2전투항공대대 아파치 헬기가 무장을 장착한 후 이륙하고 있다. 해군 제2함대와 미2사단이 실시한 이번 연합훈련은 서해상으로 침투하는 적 특수전 부대를 추적 및 격멸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한미는 무인 정찰자산이 획득한 표적 정보를 공유하고 해군 함정의 정찰ㆍ협조를 통해 미 공격헬기가 해상표적에 실제 사격을 진행했다. 2023.9.21. 연합뉴스

 

1905년 체제에 올라탄 윤석열 정부

 

2차 대전 이후 한일 간의 역사를, 러일전쟁에서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에 이르는 이 ‘1905년 체제’를 지키려는 자민당 중심의 일본 보수우파 주류세력의 ‘대결외교’와, 거기에 대립하면서 그것을 해체하려는 민주화 이후 한국 역대 정부의 ‘평화외교’(남북 간 평화 프로세스) 간 대결의 역사로 파악하는 것.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가 최근 작성한 ‘미중 대립국면과 일본, 그리고 한반도 상황’(오는 18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릴 사회대개혁지식네트워크 등이 공동주최하는 세미나 ‘미국은 어디로 가는가’에서 발표 예정)이 바로 그런 관점을 취하고 있다.

 

대결외교와 평화외교는 북한을 대상으로 삼은 개념이다. 이런 관점을 취할 때 일본 우익정부의 대결외교와 대립한 평화외교의 가장 최근의, 그리고 가장 선명한 사례로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대북 평화 프로세스=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시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궁극적 목표는 분단체제의 극복, 즉 갈라진 남북의 통합이다. 이는 곧 미국이 일본 대신 분할한 한반도의 통합이다. 자민당을 축으로 한 일본 보수우파 주류의 대결외교는 그것을 방해하거나 막는 것이다.  그들에겐 한반도의 분단체체 유지와 남쪽 절반과 일본의 유착 내지 통합이 그들의 이익 극대화에 유리하다.

 

그렇다면 전임 정부의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뒤엎는 것(Anything But Moon Jae In)을 정책의 주조로 삼고 있는 듯한 윤석열 정부는 결과적으로 일본 보수우익 주류의 대결외교에 동조하거나 그들과 한 배를 타고 있는 셈이 된다.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오른쪽에서 첫 번째)과 기하라 미노루 일본 방위상(왼쪽에서 첫 번째)이 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국방부 청사(펜타곤)에서 회담하고 있다. 지난달 개각으로 취임한 기하라 신임 방위상은 취임 후 첫 해외 방문지인 미국에서 "오스틴 장관과 흔들림 없는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것과 동시에 미일의 강고한 협력을 국내외에 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2023.10.04. AFP 연합뉴스

 

세 번의 평화체제 시도 무너뜨린 일본

4.19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거쳐 1987년 민중봉기를 통해 한국은 민주화 1단계를 완성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평화외교를 펼치기 시작한다.

 

남기정 교수는 그 이후 대체로 3차례에 걸쳐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노력(평화외교)이 전개됐다고 본다. 첫 번째가 1988년 노태우 정부의 7.7선언으로 남북의 화해협력 및 주변국과의 교차승인이 시도된 1992년까지의 시기(‘북방정책’). 그리고 두 번째가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과 6.15선언 이후의 한반도 정전체제 해체 작업. 세 번째가 2018년 2월의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시작해 판문점, 평양 남북 정상회담까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이 3번의 시도는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세 차례 좌절과 실패에는 여러 요인들이 작용했지만 자민당을 축으로 한 일본 보수우파 주류세력, 특히 아베 신조로 대표되는 우익세력의 방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남 교수는 정리한다.

 

첫 번째 평화 프로세스의 실패

 

1988년에 시작된 첫 번째 평화 프로세스는 1992년 2월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까지 나아갔다. 1990년에 한국-소련 국교가 수립됐고, 1991년에는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독립국가로 각각 가입했으며, 1992년에는 한국-중국이 수교했다. 1990년 말부터 북-일 간에도 국교 정상화 협상이 시작됐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이 제기한 북의 핵 개발 문제와 일본인 납치 문제를 의제로 붙잡고 집요하게 해명을 요구했고, 1992년 11월에 협상은 결렬됐다.

 

2002년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방문 때 일본인 납치문제를 북이 스스로 밝히면서 사죄와 재발방지를 약속하고 생존 피랍자 5명을 돌려 보냈으나 아베 신조가 관방 부장관으로 있던 일본정부는 더 많은 피랍자가 있다며 그들을 모두 일본으로 돌려 보내지 않는 한 국교 정상화 교섭을 진행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국교 정상화 교섭을 진행하면서, 또는 국교 정상화 이후 그 문제를 제대로 거론할 수도 있었으나 일본정부는 선해결 후협상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제1차 평화 프로세스는 거기서 좌절했다.

 

만일 그때 소련, 중국과 한국이 수교했듯이 미국, 일본이 북한과 수교하는 남북 ‘교차승인’이 이뤄졌다면,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북이 핵무기 개발에 올인하는 그 뒤의 역사도 없었을 것이다.

 

(2018년 10월 14일 사이타마 현 아사카에서 퍼레이드를 하는 일본 육상자위대원들. 2028.10.14. AFP 연합뉴스

 

제2차 평화 프로세스 실패

 

평양 6.15 선언으로 정점에 이른 제2차 평화 프로세스도 미국이 제기한 고농축 우라늄 의혹으로 결국 2002년의 북일 정상회담에서 발표한 평양선언이 이행되지 못함으로써 좌절했다. 

 

남 교수는 이 2번째 평화 프로세스의 프롤로그는 1998년의 김대중-오부치 게이조의 한일 정상회담이었고,  2002년 북일 정상회담은 그 에필로그였다고 했다.  과거사 청산과 배상문제, 대사관 설치까지 구체적으로 논의된 북일 평양선언은 앞서 얘기했듯이 북의 핵개발 의혹과 일본인 납치문제 처리방식에 대한 이견과 불신 때문에 이행되지 못했다.

 

제3차 평화 프로세스, 집요한 일본의 방해

 

남 교수에 따르면, 제3차 평화 프로세스는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 때 시작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의 회담을 수락하면서 탄력을 받았고, 남북 정상들의 판문점 선언을 거쳐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로 좌절하게 되는데, 여기에도 일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이 일제 강점기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확정판결을 내리자 당시 아베 정부는 그 판결이 1965년 청구권협정 위반이라며 ‘국제법 위반’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 전인 2015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불가역적으로 완전 해결한 것으로 하자고 합의한 ‘12.28 합의’를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가 사실상 무효화했을 때부터 일본은 국제법 위반 카드를 빼 들었다.

 

2019년 6월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6월 28~29일) 직후인 30일 문제인-김정은-트펌프의 판문점 회동이 성사되자, 바로 다음날인 7월 1일 아베 정부는 한국에 대한 반도체 관련 장비, 부품 수출 규제 조치를 발표했다.

 

남북 간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일본의 반발과 방해는 평창 올림픽 전부터 시작됐다. 올림픽 개막 이틀 전인 2018년 2월 7일 아베와 일본을 먼저 방문한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도쿄에서 남북의 접근을 견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평창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아베는 올림픽이 끝난 뒤 한미 군사훈련 재개를 요구했고, 문 대통령은 이를 내정간섭이라며 반발했다.

 

일본은 2017년 9월에 발간된 정책 제언서 ‘미일동맹의 재구축’에서 그때 막 집권한 문재인 정부 견제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제언서는 한국정부에 2015년 12.28 위안부 합의 이행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그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상관없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과도하게 북과의 화해를 추진할 경우 미국과 일본이 함께 이를 견제해야 한다(블로그 주인 강조)고 주장했다.

 

김태환 한일친선협회중앙회 이사장이 13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5주년 기념 한일.일한친선협회 합동친선대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2023.10.13. 연합뉴스

 

모든 것이 뒤집어지기를 바랐던 볼턴과 일본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으나, 그 전인 3월 9일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북의 불가역적인 핵 개발 포기를 위한 최대한의 압박을 계속 가해야 한다며 일본인 납치문제를 거론해 달라고 요청했다.  4월 16일에는 미국을 직접 방문해 북이 핵개발을 포기하도록 최대한의 압박을 계속하고 일본인 납치문제를 제기해 달라고 또 다시 요청했다.  그때 네오콘인 존 볼턴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이 아베의 백악관 외교에 창구 역할을 했다.  볼턴은 아베가 김정은 위원장과의 회담으로 들뜬 트럼프의 기분을 가라앉히는 “무거운 열쇠와도 같은 존재”로 높이 평가하면서 그 회담을 중재한 한국정부의 역할을 견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고 자신의 회고록에 썼다.

 

4월 12일 볼턴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만나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의제를 피하라고 요구했다. 같은 날 그는 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을 만나 일본의 입장을 확인했다. 일본은 한국과 ‘180도 다른’ 입장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볼턴의 입장과 “거의 같았다.” 야치 국장은 일본인 납치문제를 또 거론했고, 그 문제는 북미 정상회담의 의제가 됐다. 4월 12일 볼턴과 야치의 회담은 “모든 것이 뒤집어지기를 바랐던” 볼턴과 일본이 마음을 합친 순간이었다고 남 교수는 썼다.

 

4월 17일 미일 정상회담에서 아베는 북의 핵무기 프로그램, 미사일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북미 정상회담 의제에 넣어줄 것을 요구했으며,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해 언급해 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 다음날에도 아베는 트럼프와 만났고, 29일부터 중동 순방을 떠나 요르단,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등의 정상들에게도 북핵 문제와 납치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입장을 설명했다. 그날 야치 국장과 볼턴이 다시 만나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논의했다. 5월 26일 재4차 남북 정상회담(2차 문-김 회담)이 열리자 아베는 28일 또 트럼프와 통화하고 북미 정상회담 전에 미일 정상회담을 열기로 한 방침을 확인했고, 6월 7일 트럼프와의 회담 때 아베는 트럼프에게 북에 지나치게 양보하지 말 것을 재차 요구했다.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으로 아베의 대결외교는 궁지에 몰렸다.

 

2019년 2월 27일의 하노이 회담을 1주일 앞둔 20일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했고, 회담 때까지 볼턴 등 강경파를 계속 지원했다.

 

하노이 회담이 노딜로 결렬된 직후 아베는 다시 트럼프와 전화하면서 트럼프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13일 오후 일본 총무성을 방문해 스즈키 준지 일본국 총무대신과 장관급 양지회담을 갖고 한-일 내정관계자 교류회의 재개 등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한 뒤 악수하고 있다. 2023.10.13. 연합뉴스

 

캠프 데이비드 합의, 1905년 체제 2.0

 

결국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미일동맹의 벽에 막혀 좌절했다. 달리 말하면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평화외교는 일본이 워싱턴을 무대로 추진한 대결외교에 밀려 좌절했다.

 

볼턴은 문재인 대통령이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을 뒤집으려 한다고 이해했다. 그는 1965년 한일협정을 1905~45년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에서 비롯된 적대감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다.

 

이는 미국이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한일간 과거사를 봉합하고 두 나라를 유착시킴으로써,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 체결돼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질서 재편의 근간이 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조약 체제를 유지 강화하는 재료(도구)로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곧 한반도 분단체제, 휴전(정전)체제가 유지돼야 득을 보는 세력의 뜻이 관철됐다는 얘기가 된다. 윤석열 정부의 등장은 그 연장선상에 있고, 지난 8월 18일의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은 1905년 체제로의 회귀를 공식선언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례없는 한일 유착을 토대로 한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은 한미, 미일을 잇는 한일이라는 연결고리를 ‘협의 약속’ 형태로 만들어 넣어 한미일 삼각공조를 삼각동맹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이로써 냉전시절의 샌프란시스코 체제 1.0은 신냉전의 샌프란시스코 체제 2.0으로 거듭났다. 그것은 1905년 체제 2.0이라고도 할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부지 내의 핵오염수 저장탱크들 모습.  2023.08.24. EPA 지지통신 연합뉴스

핵오염수 해양 투기도 동아시아 정전체제=1905년 체제의 산물

남기정 교수는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 투기(방류) 문제도 동아시아 정전체제의 산물, 즉 1905년 체제=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산물로 본다. 2차대전 이후 일본은 동아시아 정전체제 속에서 ‘기지국가’이자 ‘원전국가’로 존재해 왔다. '기지국가'가 전후국가 일본이 동아시아 정전체제 속의 군사적 지위를 표현하는 말이라면 '원전국가'는 그 사회경제적 표현이다.

동아시아 정전체제에서 일본만 원전국가일 수는 없다. 1953년 12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 '평화를 위한 원자력' 이후, 미국은 일본에서 원자력 발전 계획을 신속하게 채택했다. 이는 일본을 소련, 중국에 대한 쐐기로 사용하려는 미국의 전략에 기반을 둔 것으로. 원전은 미군기지와 등가물로, 미일동맹의 상징이다.

한국과 대만도 같은 길을 걸었다. 일본은, 한국 대만과 함께 ‘대표적인 잠재적 핵보유국’으로 분류된다. 일본에서 도카이무라가 미일원자력동맹의 상징이라면, 롯카쇼무라는 잠재적 핵보유국 일본의 상징이었다. 그런 배경을 고려하면, 원전오염수 문제는 미일동맹의 문제이면서, 미국이 주도하고 일본과 한국, 대만이 참여한 동아시아 원전 질서의 문제이기도 하다. 즉 원전오염수 문제는 미중 대립을 배경으로 추진되는 한미일 동맹화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후쿠시마 해양 투기는 롯카쇼무라 해양 투기 예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일본에서 탈핵 움직임이 일었고, 대만과 한국에서도 탈핵 움직임이 있었다. 이는 원전 거버넌스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지위를 흔들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그 뒤 이들 국가는 원전 재가동 및 원전산업 확대로 선회했다. 그 배경에 미국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남 교수는 지적했다.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는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원전질서에 제동을 거는 악재가 될 수 있다. 원전국가에게 오염수의 해양 투기는 사활적 문제다. 원전의 사용후 핵연료를 롯카쇼무라 재처리공장에서 재처리한 뒤 플루토늄을 추출하고 나머지를 핵폐기물로 처리하는 것이 일본의 원자력 정책의 근간인데, 삼중수소는 제거가 안되기 때문에 바다에 방출할 수밖에 없다. 롯카쇼무라 재처리공장에서는 매년 800톤의 핵연료를 처리하고 삼중수소가 포함된 오염수를 바다에 방출할 계획이다. 후쿠시마 오염수의 해양 투기에 제동이 걸릴 경우, 롯카쇼무라에서의 재처리공장을 가동시키기 어려워지면서, 일본의 원자력정책이 근간에서 붕괴할 수 있다. 원전국가의 붕괴는 기지국가의 종언으로, 그리고 나아가 동아시아 정전체제의 해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일본은 오염수를 해양 투기 할 수밖에 없고, 미국은 이를 묵인하거나 지지할 수밖에 없으며, 한국정부와 대만정부도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조사 보고는 거기에 동원되는 절차적 형식요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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