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되고 있는 ‘북일수교 회담’
지난 5월말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이 두 번째로 북한을 방문하면서 북일수교가 시야에 들어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북일 간에 수교를 위한 본격적 회담이 재개되고 있지 않다. 전망도 그리 밝지 않다. 납치피해자 가족들이 귀국하고(생존자 가족 8명 중 5명이 귀국, 귀국하지 않은 3명은 미군 탈영병 젠킨스와 그 가족들이었다) 5월의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식량, 의약품과 같은 일본의 대북 인도주의적 지원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질 예정이지만, 2002년 10월의 12차 회담이후 중단된 수교회담은 열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북한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은 총 12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2002년 10월 열린 12차 회담 이후 중단된 상태이다. 1991년 1월부터 1992년 11월 8차례, 2000년 4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3차례의 북일수교를 위한 회담이 열렸었다.
1990년대에는 핵의혹과 KAL기 폭파사건의 용의자 김현희의 일본인 일본어 선생 ‘이은혜’의 존재가 돌출되면서 중단되었다. 2000년에는 일본이 전제로 제시한 ‘납치문제’와 ‘북한 미사일 문제’ 그리고 북한이 제시한 ‘과거청산’과 ‘전후보상’의 줄다리기 게임으로 또다시 결렬되었다. 주지하다시피, 2002년 9월 고이즈미의 극적인 평양방문 이후 열렸던 2002년 12차 회담은 납치문제로 인한 일본 내 여론의 역풍과 미국의 대북 특사 켈리가 제기한 ‘핵프로그램 시인’ 파문으로 좌초했다(이 글 말미의 북일관계 주요일지 참조).
또다시 표류하고 있는 납치문제
올해 5월 정상회담 직후 “1년 이내에 관계를 ‘정상화’하고 싶다”던 고이즈미 수상의 발언과는 달리, 수교협상 회담이 일정도 잡지 못하고 있는 직접적 원인은 납치문제 해결이 난항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8월11일 납치 의혹 일본인 실종자들의 안부 재조사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베이징에서 열린 북일 실무자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것이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올해 5월의 2차 북일 정상회담 과정에서 요코다메구미씨를 포함한 피랍자 중 생사가 불분명한 행방불명자 10명에 대한 재조사를 약속했었다.
일본 내 납북자가족모임과 일부 야당의원들이 납북 행방불명자 10명의 안부 확인이 끝날 때까지 수교협상에 절대 응해서는 안된다는 강경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의 호소다 히로유키(細田博之)관방장관도 납치문제 실무자회의에서 북한이 구체적인 조사결과를 내놓지 않자 "실종자 안부 재조사에 진전이 없으면 (국교정상화 협상 재개는) 안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특히, 일본의 민주당은 이미 고이즈미 수상의 방북을 반대한 바 있으며 “매국적인 외교”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었다. 또한, 8월11일 베이징에서 열린 실무회담이 별반 성과없이 끝나자 ‘북일수교 협상을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주당은 일본의 보수양당체제를 지탱하는 제1야당이며, 이미 여러 차례 자민당보다도 더 강경한 대북(對北) 태도를 보인 바 있다.
북일수교로 가는 길, 도전과 기회
납치문제 이외에도 북일 관계가 정상화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도전들’이 있다. 첫째, 북한 핵 및 미사일 문제와 같은 동북아 지역 안보의 긴급한 현안이다. 둘째, 대포동 미사일 실험, 불심선, 납치문제 등 연이은 사건들에 의해 일본 내 만연되어 버린 반북 감정이다. 셋째, 55년 체제 붕괴이후 갈수록 보수화·우경화되고 있는 일본의 정치구조이다. 국내정치의 보수우경화는 공격적인 대외정책으로 드러나곤 한다.
첫째, 핵 및 미사일 문제이다.
미사일 문제를 특기(特記)한 것은 미국과 달리 일본은 북한의 미사일 사정거리에 놓여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고 핵 못지않게 북한 미사일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북미관계이고 ‘미국 변수’이다. 북한과 미국 사이의 ‘핵을 둘러싼 공방과 대립’이 어떤 식으로 해결의 가닥을 잡아 갈 것인가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북일관계가 북미관계의 종속변수로 보이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판단과 달리 이 문제를 넘어서는 데 있어서는 새로운 활로가 열릴 수도 있다. 고이즈미 수상의 두 번에 걸친 평양 방문과 두 번에 걸친 북일 정상회담의 성사는 그 좋은 예이다. 첫 번째 방문에서는 ‘북일 평양선언’이라는 성과가 나왔고 두 번째 방문에서는 납치피해자 가족들의 귀국, 북한에 대한 일본의 인도적 지원이라는 성과가 있었다. 뿐만아니라, 두 번째 평양 방문 이후 고이즈미 수상은 미국에 대해 6자회담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다시말하면, 북한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일정한 ‘균형점’에 이르면 북일 관계 정상화를 향한 '모멘텀'(momentum)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일본의 일반시민들 사이에 만연된 반북 감정이다.
북일관계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2002년 9월17일 ‘북일 평양선언’ 과정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수상이 납치문제에 대한 진실을 확인하고 사과하는 것을 통해 일정한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은 ‘오산’(誤算)이었다는 것이다.
고이즈미 수상이 귀국하면서부터 일본의 언론과 여론은 급격히 반북의 열기로 들끓었다. 북한의 미사일 위협이 강조되었고, 켈리의 방북 이후에는 미사일에 장착될 핵탄두의 위험성이 더해지면서 피폭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총련계 재일교포들에 대한 린치와 폭행처럼 일반 시민들의 ‘공격적 대응’도 빈발했다. 2003년 9월17일은 역사적인 ‘북일 평양선언’ 1주년으로 기념되지 않고, 북한이라는 “그로테스크한 국가”가 저지른 일본국민 납치범죄가 드러난 후 1년이라고 기억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납치문제가 고이즈미 내각에 양날의 칼이라는 점이다. 이는 일본의 ‘국익’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납치문제가 2002년 북일정상회담 이후 일시 귀국했다가 머물러 버린 5인의 가족들이 귀국하는 것으로 끝날 것인가이다. 현재 북일간 대화가 답보상태에 놓여 있는 이유는 사망자로 통보된 8인에 대한 재조사, 그리고 납치의혹으로 제기되고 있는 200여명의 행불자에 대한 조사 등의 문제이다. 게다가, 6자회담 과정에서 “납치문제에 납치되어버린” 일본의 외교는, 결국 동북아 외교에서 일본의 입지를 축소시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일본 외무성 관료들이나 ‘현실주의적’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납치문제를 6자회담이나 북일수교 회담에 연계하는 것에 대한 회의적 견해를 제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셋째, 일본의 우경화된 정치구조이다.
탈냉전기 일본의 대북한 이미지가 급격하게 악화되는 과정에서 일본 정치의 우경화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자민당의 분열로 촉발되었던 ‘55년 체제’의 붕괴는 아이러니하게도 사회당과 공산당의 몰락, 그리고 혁신정치세력의 왜소화라는 형태로 귀결되었다. 정당시스템 또한 자민당과 민주당의 보수양당체제로 '동결'(freezing)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정치적 토양을 기반으로 일본의 정치·군사대국화를 향한 정치일정은 탄력을 받고 있다.
자민당과 민주당의 정치인들은 북한에 대한 경쟁적 강경발언으로 표를 만들고 있다. 민주당이 자민당보다 북한에 대해 강경한 발언을 하거나 강경한 태도를 보이곤 하는 것은 그만큼 일본 국민들사이에 반북정서가 만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보수양당이 그러한 여론을 확대재생산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대외적 ‘위협’을 필요로 하는 보수우익 정치인들에게 ‘눈에 보이는’ 북한의 위협은 자신들의 열망을 실현하는 정당성의 근거가 되고 있다. 선제공격론과 전수방위 폐지 움직임, 미사일방어 도입, 유사관련 법제의 입법화 등은 모두 북한 위협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추진되고 있다.
일본 보수우익의 ‘주류들’은 미국의 세계전략과 동북아 전략에 적극적으로 편승하면서 정치군사대국화의 길을 착실히 가고 있다. MD편입 과정에서 무기수출 3원칙의 사실상 ‘폐기’를 추진하고 있으며, 미국과 함께 ‘예상되는’ 위협에 대한 “선제공격론”을 공조하려고 하고 있다. 일본과 역할을 분담하려는 미국의 동북아전략에 편승해 유사관련 법제를 통과시켰다. 자위대는 전후 최초로 전쟁지역인 이라크에 ‘파병되었다’.
가능성의 공간을 확장시키는 상상력이 필요
중요한 것은 한국 정부의 행태이다. 한국 정부는 MD에 편입하면서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으며 자위대와 손을 맞잡고 이라크로 ‘진군했다’. 식민침략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경험한 한국은 미국이 벌린 침략전쟁에 두 번째로 참전한 것이고, 이라크 파병을 계기로 해외활동을 주임무로 하려는 자위대와 이라크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순적 행태는 미국=국제사회라는 ‘상상력의 결핍’에 시달리는 한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익’이라는 정치적 레토릭에 외교를 종속시키는 외교에서의 ‘철학의 빈곤’을 극복하지 않는 한, 말로는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의 평화·번영을 외치면서도 스스로 평화의 걸림돌이 되어버리고 마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말 것이다.
북일 관계와 북일 수교의 문제를 우리의 중요한 과제로 받아들이고, 그 과정에서의 도전과 기회를 동시에 살펴보며 그 의미를 다시한번 확인해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북일관계의 정상화는 ‘주어지는’ 외적환경이 아니라 산적한 ‘한반도문제’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과 일본, 한국과 일본의 관계라는 기존의 접근방식에서 벗어나 ‘한반도와 일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동북아 평화의 가능성을 조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북일관계 주요일지>
▶ 1989년 3월 일본의 다케시다 총리, '조건없이 북한과 대화' 성명
▶ 1990년 9월 가네마루 신을 단장으로 한 자민당ㆍ사회당 대표단 방북
11월 북일 예비회담 베이징에서 개최
▶ 1991년 1월 국교정상화 1차 회담 평양에서 시작
▶ 1992년 11월 국교정상화 8차 회담에서 핵의혹, ‘이은혜 사건’으로 결렬
▶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서 체결
▶ 1995년 3월 일본 집권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3당 대표단 북한 방문
▶ 1997년 5월 북일 외무성 과장급 베이징서 비공개 접촉
8월 북일 외무성 부국장급 회담 재개 합의
9월 북일 적십자회담에서 일본인 처의 고향 방문 합의
11월 일본인 처 고향 방문단 1진 일본 입국
12월 일본 적십자사 행불자 명단 제출
▶ 1998년 4월 일본 적십자사 대표단 북한 방문
8월 북한 ‘대포동 미사일’ 발사 실험
▶ 1999년 9월 미국의 페리 특사 평양 방문
12월 북일 적십자 회담, 일본은 북측에 일본인 처 재회와 행불자 조사 의뢰
▶ 2000년 6월 남북한 평양에서 정상회담
10월 북일 국교정상화 11차 회담, 북미 공동 코뮈니케 발표
▶ 2001년 12월 북한 적십자사가 행불자 조사 중단, 일본 근해에서 북한 선적으로 추정되
는 불심선(不審船)과 일본 해상보안청 경비정 충돌
▶ 2002년 8월 적십자 6차 회담 평양에서 재개
9월 평양에서 북일 정상회담
10월 미국의 켈리 평양 방문 후 “북한이 핵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했다”고 공개
▶ 2003년 1월 북한, NPT 탈퇴 선언
▶ 2004년 5월 평양에서 2차 북일 정상회담
8월 베이징에서 실무회담
다시 「북일 평양선언」으로
이준규(평화네트워크 운영위원/한일연대코디네이터)/2004년 9월 15일
2002년 9월, 일본의 ‘선택’
2002년 9월의 북일 정상회담이 성사된 것은 북한과 일본 양 정상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었던 것은 물론이지만, 특히 고이즈미 수상의 ‘결단’은 내외의 주목을 끌만한 것이었다.
2002년 1월 부시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지목했고 핵태세검토보고서(NPR)에서는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었다. 출범초기부터 "ABC"(anything but Clinton)라는 말로 클린턴 행정부 시절의 모든 정책을 부정하던 부시행정부가 노골적으로 대북 강경정책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러한 대북정책기조는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이후 진전되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단순히 중단시킨 것 뿐만아니라 거꾸로 돌린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미국 외교안보정책의 압도적인 영향력 하에 놓여 있는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에 ‘편승하여’ 일본 내에서는 납치문제, 공작선(혹은 不審船) 침투, 핵 및 미사일 문제 등을 제기하는 반북적 견해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고이즈미 수상은 “정치생명을 걸고 방북 한다”는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2002년의 북일 정상회담이 가능했던 것은 우선, 일본의 대내적 요인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고이즈미 수상은 경기회복의 저조와 개혁정책의 지지부진함에 의해 인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는 대외적 성과로 대내적 과오를 만회해 보고자 하는 동인(動因)이 되었던 것이다. 올해, 고이즈미 수상이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북일 정상회담을 결행한 것은 이 점을 다시한번 확인해 준다.
그러나, 대내적 요인에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대외적 상황에 대한 판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 부시 정부의 대북강경책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대북포용정책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고 북한과의 교류협력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해 6월 서해교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는 남북을 연결하는 경의선, 동해선 건설이 가시화되고 9월 부산아시안게임에 북측에서 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하기로 했던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둘째, 북한의 움직임이었다. 북한은 부시행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중국, 러시아와 상호방문을 통한 정상회담을 했고 김영남 최고인민위원회상임위원장이 동남아 순방외교를 하기도 했다. 또한, 2002년에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라오스 등의 정상을 초청하는 적극적 외교를 전개했다. 뿐만아니라, 그해 8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한반도 종단철도를 연결하는 사업이 논의되고 7.1.경제개선조치와 신의주특구설치와 같은 ‘개혁개방’ 정책이 발표되었다.
이와 같은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에서 일본이, 구체적인 ‘안’을 제시하지도 않으면서 前정권에 대한 네가티브로 일관하고 있는 부시행정부만을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곧,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입지를 축소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동북아 외교무대에서 주변국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의 입장에서도 북일 정상회담의 손익계산표는 플러스였던 것이다.
2002년 9월17일 ‘북일 평양선언’의 의미
도쿄대학(東京大學)의 강상중 교수는 2003년 출간된 『북일관계의 극복: 왜 국교정상화교섭이 필요한가(日朝關係の克服:なぜ國交正常化交涉が必要なのか)』이라는 저서에서 2002년 북일 정상회담과 양국 정상의 합의하에 발표된 ‘9.17 북일 평양선언’(이하 선언)에 대해 다음과 같은 3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첫째,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협상의 상대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클린턴 정권 때 발표된 ‘페리프로세스’의 기조는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협상의 상대로 인정하고 관계 정상화를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일본도 이러한 기조를 받아들이면서, ‘있는 그대로의 북한’과 국교 수립을 추진하고 북한을 동북아시아 국제질서 속에 참여시킴으로써 점진적인 국내 개혁을 유도한다는 방침을 채택한 것이었다.
이것은 북한체제를 전복하고 체제교체를 해야 한다는 일본 내 대북 강경 목소리를 감안한다면 일본 정부와 외교당국의 의미 있는 결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본 정부가, 북일 정상회담이라는 계기를 통해 현재의 북한을 인정하고 북한의 국내 개혁을 지지, 지원해 주는 국제협력체제를 만들어 가겠다는 방침을 명확히 한 것이다.
둘째, 한반도문제에 관한 다자주의적 협상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주변 동북아시아 지역의 다자적 협력 및 신뢰양성에 표리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다.
북한은 그동안 미국만을 주요한 협상 상대로 삼아왔고 한국과 일본은 항상 그 다음 순위로 밀려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북한이 다자주의적 접근을 인정했다는 것은 커다란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일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일미 안보체제 하에서 미국 일변도의 외교를 해왔던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다자주의적 외교정책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강상중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시아 부재(不在) 외교로”부터의 전환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셋째, 동북아 다자간 안보체제 구축의 단초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선언은 핵 및 미사일문제를 포함한 북일 간 혹은 동북아 지역 안보현안은 동북아 관련국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해결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강상중 교수는 바로 이 점에서 북일 교섭이 북일 양국 관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남북대화와 북미대화, 더나아가 중국과 러시아의 참여까지 이어지는 다층적인 다자적 틀과 긴밀히 연결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선언은 북일 양국의 선언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전후 동북아시아 역사에 있어서 최초로 북일관계 정상화 프로세스가 동북아 다자간 대화와 협의라는 틀과 연계되어 언급되고 있는 최초의 문서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자간 협력적 지역안보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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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북일 평양선언 합의내용>
▶ 일본인 납치 문제 - ① 김정일 위원장의 공식사과, 재발방지 약속 ② 북한은 피랍 11명 중 생존 4명, 사망 6명이라고 확인(나중에 1명의 생존을 추가 확인)
▶ 과거청산과 배상 문제 - ① 1995년 무라야마 수상 담화에 포함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과(お?び)”로 처리 ② 한일국교 정상화 과정과 동일방식 보상 ③ 1945년 8월15일 이전 재산청구권 상호포기 ④ 무상자금/저금리 장기차관/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적 지원 등 경제협력방안 합의
▶ 핵 및 미사일 문제 - ① 북한 2003년 이후 미사일발사 실험 유예 지속 ②한반도 핵문제의 포괄적 해결을 위해 국제합의 준수 및 관련국들과의 대화 해결 원칙 합의
▶ 국교정상화 - 장관급 수교협상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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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의 정치’에서 다자주의로
한편, 강상중 교수 뿐만아니라 한국에도 잘 알려진 와다하루끼 교수도 ‘북일 평양선언’이 동북아에서 다자적 협력안보의 틀을 창출할 수 있는 계기였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와다하루끼 교수의 최근 저서는 국내에도『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신지역주의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일본의 대표적 비판적 지성인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이라는 구상을 제시하면서 일본의 대미일변도(對美一邊倒) 외교를 비판 해 왔다. 즉, 북일 정상회담과 북일 수교는 이와같은 외교적 관성(inertia)에서 탈피해 동북아 다자간 협력이라는 새로운 질서에 일본이 동참할 수 있는 역사적 ‘계기’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북일 수교는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국제질서가 등장하는 결정적 국면이 될 수 있다. 외형상으로는 현재까지 답보상태에 빠져있는 남북한 교차승인의 완성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을 동북아시아 및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한다는 의사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북일 수교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의 정치’를 해소하고 다자적 질서를 창출하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탈냉전 이후 동북아시아 지역은 유럽이나 동남아시아와는 달리 다자간 협력적 질서는 생성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오히려 미-일-한 동맹이 군사적으로 일체화되고 공격적으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북한위협론’과 ‘중국경계론’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북일 수교의 필요성과 의미는 커지는 것이다. 북일관계 정상화 과정은 그 자체로 멈추지 않고 남북한 평화프로세스의 진전과 상승효과를 불러 올 것이며 그것은 곧, 동북아 지역에서 미국의 절대적 지위를 상대화하고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동맹의 정치를 ‘자연스럽게’ 해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북일 평양선언으로’, 그리고 남겨진 과제
2002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수상의 회담 결과 발표된 ‘북일 평양선언’은 일본인 납치문제와 과거사 청산과 배상 문제, 핵 및 미사일 문제, 그리고 국교정상화에 대한 ‘포괄적 합의’를 담고 있었다. 특히, 최대 현안이었던 납치문제와 과거사 청산 및 배상문제가 합의되면서 한때 일본 내에서도 ‘외교적 승리’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물론, 납치피해자들의 사망자 소식이 알려지면서 전부 잊혀져버렸지만......).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북일국교 정상화가 일본의 입장에서는 지난 과오를 정리하고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책임 있는 일원으로 다시서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선언에서 과거사에 대한 문제가 그다지 진전된 성과를 담고 있지 못한 것은 여전히 과제로 남는다. 사과의 표현은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과(お?び)”로 처리되었고 배상 방식도 한일국교 정상화 과정과 동일한 방식으로 합의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관계정상화 과정을 주로 경제적 지원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도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조속한 북일 수교’가 바람직하다는 측면과 북일 수교의 ‘과정이 바람직해야 한다’는 측면이 충돌할 수 있는 난제일 수 있지만, 또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북일 수교는 한반도와 일본이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이며, 또한 동북아시아 차원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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