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세계의창] 야스쿠니의 모순 / 다카하시 데쓰야
2008-01-06
2008년 새해가 밝았다. 새로운 해의 첫 칼럼이지만 지난해에 이어 야스쿠니 신사 문제로 시작하는 것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히로히토 ‘천황’이 에이(A)급 전범 합사에 불쾌감을 품고 야스쿠니 참배를 중지한 것은, 그가 도쿄재판 결과에 감사했다는 데부터 생각하면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한 바 있다.
야스쿠니는 천황의 명령으로, 그의 나라를 위해 전사자를 모셔 왔다. 그런 ‘천황의 신사’ 야스쿠니에 천황의 의사에 반해 전범을 합사하고 천황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그의 참배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자기모순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 현 천황까지 포함해, 30년 이상 참배하지 않는 이상사태가 지속되지만, 야스쿠니로서는 에이급 전범을 분사해 이를 해소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야스쿠니 자신이 다른 ‘영령’과 마찬가지로 “일단 신으로 모신 것은 신도의 도의상 분사할 수는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의 에이급 전범 분사 요구나, 유족들의 합사 취하 요구에 대해서도 이런 논리로 거부해 왔다. 그런 만큼 이제와서 “천황폐하가 참배하길 바라기 때문에 에이급 전범은 제외합니다”라는 얘기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히로히토도 전후 1975년까지 30년 동안 여덟차례 야스쿠니를 참배했다. 자신의 명령 때문에 전사한 200만명 이상의 ‘영령’이 모셔져 있는 야스쿠니에 히로히토 자신이 천황으로서 참배를 계속했던 것이다. 그것이 패전 뒤에도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 ‘야스쿠니 신앙’이 남은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예컨대 천황이 도쿄재판에 회부돼 그 지위를 박탈당했다면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야스쿠니 신사처럼 한편으로 히로히토와 천황제를 근거로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도쿄재판 부정론에 서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런 자기모순이 결코 야스쿠니 신사만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할 터이다.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비롯해 도쿄재판 부정론에 의한 ‘제국 일본’의 역사 재평가를 지향하는 현대 일본 우파 세력이 안고 있는 모순이기도 하다. 일본의 우파에게 과거도 지금도 천황제야말로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최후의 의지처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예컨대 아베 전 총리는 “일본의 국가 색깔을 나타내는 근간은 천황제”이며 “일본의 역사는 천황을 날실로 해서 직조된 장대한 주단”이라고 말했다. “전후의 일본 사회가 기본적으로 안정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은 행정부의 장과 다른 천황이라는 ‘미동도 하지 않는 존재’가 있어 가능한 게 아닐까”라고 주장하기도 했다.(아베 신조 저서 <아름다운 나라에>)
그러나 패전하고도 천황이 ‘미동도 하지 않은 존재’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도쿄재판에서 천황 면책이라는 중대한 사실에 의존하고 있다. 에이급 전범으로 천황 기소라는 근대 천황제 최대의 위기가 더글러스 맥아더와 미국이 방패역할을 한 도쿄재판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무시하고 있다. 요컨대 현대 일본 우파세력은 도쿄재판의 결과를 부정하려고 하면 히로히토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 된다. 또한 전후 천황제의 최대 의지처가 실은 미국이었다는 것을 무시하는 자기모순에 빠지는 게 되는 것이다.
히로히토 천황은 도쿄재판에서 기소를 면해 1947년 5월 새로운 일본헌법의 시행과 함께 ‘일본국’과 ‘일본국민통치’의 ‘상징’이 된다. 천황은 정치권력을 일체 갖지 않는 것으로 됐다. 그러나 이때 히로히토는 헌법 규정에 반해 전후 일본의 새로운 ‘국체’라고 할 만한 것을 형성하는 데 한몫 하려고 했다.
다카하시 데쓰야/도쿄대 교수·철학
[한겨레 세계의창] 히로히토가 도쿄재판을 반긴 까닭은 / 다카하시 데쓰야
2007-12-02
오랜만에 야스쿠니 문제로 시작하고 싶다. ‘시작하고 싶다’는 표현을 쓴 것은 사안이 일개 신사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후 일본’ 전체에 관한 문제로 돼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도미타 메모’에 대해서는 이미 이 칼럼에서 다뤘다.(2006년 8월8일치) 1988년 당시 도미타 도모히코 궁내청 장관이 쇼와(히로히토) 천황의 비공식 발언을 적어놓은 메모를 말한다. 이 메모에는 태평양전쟁을 주도한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에 강한 불쾌감을 품은 히로히토 천황이 1975년을 마지막으로 야스쿠니 참배를 중단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일본의 우파, 야스쿠니파의 논객들은 이 메모가 사실이라면 자신들의 입지가 크게 줄어들기 때문에 메모의 날조설까지 제기해 그 증거 능력을 어떻게 하든 부정하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이후 도미타 메모의 내용과 합치하는 여러 자료가 공표된다. 히로히토 천황의 시종을 지낸 우라베 료고의 일기와 히로히토 천황에게 시를 가르치는 일을 했던 오카노 히로히토의 저서를 통해 소개된 도쿠가와 요시히로 전 시종장의 발언이 그것이다. 아무리 우파라고 해도 이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어렵게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천황 자신과 관련된 깊숙한 문제가 잠복해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일본의 우파, 야스쿠니파, 특히 도쿄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 부정론자가 결코 다루지 않은 어떤 사실이 있다. 히로히토 천황이 도쿄재판의 결과에 감사했다는 사실이다. 1951년 4월15일 점령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와 히로히토 천황의 마지막 회담(11번째)이 열렸을 때, 천황은 맥아더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쟁재판에 대해 귀 사령관이 취하신 태도에 대해 이 기회에 사의를 표하고 싶다.” 맥아더의 답은 이렇다. “워싱턴에서 천황 재판에 대해 의견을 물어왔지만 물론 반대했다.” 이런 대화 내용은 회담에서 히로히토 천황의 통역을 지낸 외교관 마쓰이 아키라의 수기에서 밝혀진 것이다.(<아사히신문> 2002년 8월5일치 보도)
그럼 왜 히로히토 천황은 도쿄재판의 결과에 감사했던 것인가? 도쿄재판의 최대 정치적 초점은 히로히토 천황이 전범으로 기소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미국 여론이나 오스트레일리아 등 다른 연합국들의 소추론을 누르고 천황 불기소를 결정한 것은, 점령통치와 친미 정권 확립을 위해 천황을 이용하려고 생각한 미국 정부였다. 도쿄재판은 이런 의미에서 A급 전범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천황에게 면죄부를 준 재판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일본 정부 이상으로 천황 자신에게도 지상명제였던 ‘국체호지’(국체인 천황을 보호한다는 뜻)가 달성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히로히토 천황이 소추됐다면 천황의 지위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을 것이며, 천황제 자체가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천황제를 최대 위기에서 구한 것이 실은 도쿄재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히로히토 천황이 미국 정부나 맥아더 원수에게 감사의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히로히토 천황에게 야스쿠니의 A급 전범 합사는 어떻게 비쳤을까? 천황제를 구하고 ‘전후 일본’이 미국의 비호 아래 상징 천황제 국가로서 ‘성공적’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해준 도쿄재판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으로 보였던 게 아닐까? 여기에 히로히토 천황의 불쾌감과 참배 중지의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히로히토 천황에게 도쿄재판의 결과를 뒤집는 일만큼은 인정될 수 없었던 것이다. ‘천황의 신사’로 일컬어지는 야스쿠니는 이렇게 해서 거대한 자기모순을 껴안고 만 것이다.
다카하시 데쓰야/도쿄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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