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테러지원국 해제과정서 우리 정부 역할 '애매모호'[CBS정치부 김선경 기자] 북핵 검증체계 협상에서 북한과 미국 간 이른바 '순차적 분리검증안'이 합의되고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과정에 우리 정부의 역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북·미의 합의내용이 당초 미국이나 우리 측이 기대하고 공개적으로 표명했던 검증과 관련한 최소한의 요건조차 갖추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면서 미국의 결정 과정에 과연 우리정부가 개입해 조율할 여지가 있었는지 의문이 들고 있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을 바로 앞둔 지난달 28일 우리 측 북핵 고위당국자는 검증기준과 관련해 "검증이 검증답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핵심적인 요소가 있고 핵심적인 요소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양보가 없는데 여기에서 후퇴하게 되면 검증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 당국자는 또 "북핵검증은 국제적 기준이나 과학적 방법에 입각한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게 되면 나머지는 유연성을 보일 수 있다"며 핵심적인 요소로 '샘플 채취'와 '미신고 시설 방문'을 언급했다.
이 당국자는 이는 "미국과의 조율을 거쳐 얘기하는 것"으로 이해해 달라고 덧붙였다.
이 당국자는 특히 우리 정부의 역할과 관련해 '미국은 협상에 나서고 중국은 중재하는 모습인데 한국 위치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미국 등 관련국과 충분히 협의하며 우리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한·미 양국은 그동안 국제적 기준으로 IAEA의 특별사찰을 예로 들며
미신고시설 방문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고 시료채취 등에 의한 과학적 방법이 함께 진행돼야 한다며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압박해 왔다.
◈ 11일 공개된 북미간 합의내용은물론 북한은 이에 대해 '강도적 사찰'이라며 강하게 반발해왔다. 그러나 11일 공개된 북·미간 합의내용을 보면 우리 측 고위당국자가 밝혔던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북미간에 합의된 문건에는 다음과 같이 표현돼 있다.
- 전문가들은
신고된 모든 시설에 접근할 수 있으며 신고되지 않은 시설에 대해서는 상호 동의에 의해 접근한다.
-
샘플링과 실증적으로 규명해내는 과학적인 절차의 이용에 관해서도 합의가 이뤄졌다.- 검증체계에 포함된 모든 조치들은
플루토늄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 모든 우라늄 농축, 핵확산 활동 등에 적용된다. 여기에 6자회담 당사국들 사이에 이미 합의된 감시체계는 핵확산과 우라늄 농축활동에 대해 적용된다.
형식적으로 미신고 시설 방문은 문구에 포함됐지만 이는
북한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도록 했고 우라늄농축문제(UEP)와 핵확산문제에 대한 검증은 원론적 입장 표명에 그쳤다.
이 때문에 북한이 그동안 극력 반대해온 난제들을 뒤로 미룬 채 일방적으로 북한의 주장을 수용한 게 아닌가 하는 평가가 나왔으며 우리 당국자가 그동안 표명해온 입장과도 상당 부분 차이가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와 관련해 김숙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지난 3일 평양협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힐 차관보로부터 협상 내용을 브리핑 받은 뒤 "한미 외교장관 또는 정상간 협의도 필요하다면 가질 예정"이라고 말한 것이 다시 주목되고 있다.
힐 차관보의 방북결과를 브리핑 받은 뒤 당초 우리 측과 협의한 수준과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같은 반응이 나오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 김숙 본부장 발언 다시 관심의 대상당시 김숙 본부장의 발언은 외교부 안팎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지난 6일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힐 차관보의 평양 방문 때 '북한 측이 미국에 대해 최후통첩성 중대제안'을 했다고 보도하면서 국내 언론들이 이를 김숙 본부장의 발언과 연계시켜 북한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종전선언 등 판을 크게 흔들려는 제안을 한 것으로 분석하는 기사를 쏟아내면서 한바탕 술렁이기도 했다.
김숙 본부장의 발언은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7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힐 차관보 방북 시 북미간 협상에서는 '검증의정서'와 관련된 협상만 진행됐다고 해명하면서 진화되긴 했지만 이번에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다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동안 진행된 일련의 과정에 비춰볼 때 북·미간 협상내용이 우리 측이 기대하고 한·미간 조율을 거쳤다고 하며 여러 차례 설명한 내용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이에 따라
북·미간 협상과정 또 미국 내부 의견 조율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었으며 단순히 북미간의 합의를 통보받는 데 그치지 않았는가 하는 우려섞인 시각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일본 언론들이 미국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삭제한다고 공식 밝히기 4시간 전에야 아소 다로 총리가 미국으로부터 삭제 방침을 통보받았다고 보도한 것도 이같은 분석을 뒷받침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은 북핵문제의 직접적인 당사자로서 자국의 이해관계를 북핵 국면에 포함시키려는 일본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북·미간 협상과정과 미국 내부 의사 조율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사실 관계가 규명돼야 한다는 얘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북핵 폐기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수없이 많은 상황에서 사실과 다르게
우리 정부가 '레버리지'가 전혀 없는 것으로 비쳐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 정부 북핵 외교라인의 역할에 대한 심각한 우려와 함께 책임소재에 따른 문책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sunkim@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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