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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의 삶과 죽음, 진실을 밝힌다(상)(하)- 김창수 통일맞이 정책실장(통일뉴스)

한반도

by DemosJKlee 2014. 1. 10.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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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의 삶과 죽음, 진실을 밝힌다 (상) 

 

김창수 통일맞이 정책실장, 하태경의 '북한발 문익환 프락치설' 반박

 

2012년 07월 09일 (월) 18:14:48 김치관/이광길 기자 tongil@tongilnews.com

 

 

“문 목사가 시대와의 불화 속에서 주장했던 것이 많은 부분 현실화되고 있다. 제가 하태경 의원의 주장에서 팩트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문 목사의 통일론을 계승해서 다음 정권에서 이를 과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김창수 ‘(사)통일맞이 늦봄 문익환목사 기념사업회’(통일맞이) 정책실장은 최근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이 문익환 목사의 사인(死因)에 대해 북한이 문 목사를 ‘프락치’로 몰았기 때문이라고 여러 매체에서 주장한데 대해 본격 반박에 나섰다.

김창수 실장은 7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인사동 한 찻집에서 가진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통일운동 진영 내부에서 문 목사의 ‘프락치’ 논란은 일종의 치부이고, 지금까지 이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얘기를 하지 않았다”며 “하태경 의원의 인터뷰나 주장이 사실과 많이 달랐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당시 재야에서 존경받았던 문익환 목사는 1989년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회담했으며, 출옥 후 ‘새로운 통일운동체’(새통체) 구성을 추진하면서 범민련과 마찰을 빚다 이른바 ‘프락치’ 논란의 와중에 1994년 1월 18일 급서했다.

김창수 실장은 먼저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의 주장에 대해 요약했다.

“우선 하 의원 주장부터 보자면, 저서(민주주의는 국경이 없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오마이뉴스 등과의 인터뷰에서 매번 조금씩의 차이는 있다. 저서 중심으로 해서 인터뷰 내용을 종합해서 말하자면, <문 목사는 북한의 범민련 의장인 백인준으로부터 ‘문익환은 프락치’라는 팩스를 받고 충격을 받아서 쓰러졌고 돌아가셨다. 밥알이 기도에 막혀서 돌아가셨다>고 얘기하고 있다.

나중에 또 얘기하는 것은 <문 목사가 김일성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김일성으로부터 답장이 오지 않고 백인준으로부터 답장이 왔고 그 답장에 ‘프락치’라는 내용이 있어 쓰러졌다. 백인준의 답장은 김일성의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올 수 없는 편지다>. 또 어떤 경우에는 <그 편지는 김일성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올 수 없는 것이나 그 당시에는 김정일이 모든 일을 담당했기 때문에 김정일의 뜻이 담긴 편지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이런 내용을 보자면, 북한의 최고 지도부, 김일성 김정일의 뜻이 담긴 편지를 북 범민련 의장 백인준이 문 목사에게 보냈고 그 내용에는 ‘문익환은 프락치’라는 내용이 담겼다. 하태경 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문 목사는 자기가 만났던 김일성 주석이 자기를 프락치라고 생각한 걸로 알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으로 돌아가셨다.

하 의원 본인은 그 당시에 이걸 알고 ‘북한 나쁜 놈들이다’ 생각하고 그것을 기회로 생각을 달리 하게 됐다, 사람들은 하 의원이 변절이다 전향이다 하는데 하 의원 본인은 변절도 전향도 아니라고 하니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생각을 180도 달리 하는 길을 걷게 됐다고 하 의원 본인은 주장하고 있다.”

김 실장은 “방치할 경우에는 워낙 영향력 있는 메이저 언론에서 다뤘기에 사실이 되고, 외국 속담에 ‘거짓말도 반복하면 사실이 된다’고 하는데,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며 “제가 알고 있는 팩트는 다르다”고 상세히 밝혔다.  


 

 

 

   

▲ 백인준 범민련 북측본부 의장이 보내온 자필 서신 첫 쪽. '신고필' 도장이 선명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우선 1993년 12월 10일 범민련 북측본부 백인준 의장으로부터 문익환 목사에게 편지가 온다. 장문의 편지다, 지금 제가 그 사본을 갖고 있다. 편지에는 백인준 의장이 문 목사를 처음 만난 게 문 목사가 평양을 방문했던 1989년이다. 그 당시 만났던 감동을 회고하면서 A4용지 9장 분량의 자필로 쓴 편지다.

요지는 문익환 목사가 당시 새로운 통일운동을 주장하는 데 대한 반대의견이었다. 문 목사의 새로운 통일운동 주장은, 백인준 의장에 따르면 남한 지역에서 하자는 통일운동이기 때문에 남한 지역에서 통일운동이 아무리 대중화가 된다 해도 3자연대가 되지 않은 남한 지역만의 통일운동은 남한의 지역운동이거나 남한의 시민운동이지 통일운동이 아니다. 통일운동은 남북해외의 3자가 삼발이와 같은 형태로 진행돼야 한다. 이게 백인준 의장이 문 목사의 새로운 통일운동체에 반대하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그 편지에서 문 목사를 너무 존경하고, 백 의장도 시인이다. 문 목사도 시인이고. 1989년에 두 분이 윤동주 시인에 대해 얘기를 나눴던 것으로 보인다. 편지 말미에 윤동주 시인의 시를 얘기하고 문 목사를 만났던 것을 기억하면서 이를 회고하는 시집을 냈다고 하면서 마무리하고 있다. 이것은 의견의 차이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고 매우 정중한 편지다. 첫 번째 편지다.

   
▲ 김창수 실장은 자료들에 근거한 사실관계, '팩트'를 강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저도 문 목사의 뜻을 따라서 새로운 통일운동을 주장하던 입장이다. 이 편지가 완곡한 편지였기는 하지만, 새로운 통일운동에 대해서 북이 반대하는 것에 대해 저는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하태경 의원도 마찬가지였고. 그리고 이 편지가 공개됐다. 백인준 의장이 문 목사에게 사신으로 보낸 것인데 이것이 공개된 것이다. 이 편지가 공개된 데 대해서 문 목사는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셨고 저도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이 편지 공개를 계기로 논란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그래서 문 목사가 이 편지 공개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면서, 이 편지가 공개됐으니 공개적으로 답신할 수밖에 없다며 공개 답신을 보냈다. 이게 두 번째 편지다.

문 목사 본인이 범민련을 탈퇴한 이유는, 새로운 통일운동을 하려는 이유는 통일운동을 남북해외가 힘을 합쳐서 더 잘하기 위해서이고, 남쪽에서 통일에 대한 국민적 열기가 높아지고 있는데 이 통일에 대한 국민적 열기가 높아지는데 따른 새로운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 내용을 백 의장에게 편지를 보내고 백 의장이 자기와의 만남을 회고하는 시집을 냈다는 것에 대해서 꼭 만나서 그 시집을 보고 싶다고 답신을 보낸다.

두 분은 통일운동의 방향에 대해서 명백하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두 분이 그것 때문에 편지에서 ‘너는 프락치다’는 이런 천박한 논쟁을 하지는 않았다.

세 번째 편지가 바로 문 목사 돌아가셨던 1994년에 왔던 것이다. 그 편지에서 ‘프락치’라는 내용이 담긴 것인데 이 편지는 정확하게 유럽 범민련에서 보낸 것이다. 당시 유럽 범민련, 그러니까 범민련 해외본부 의장이 윤이상 선생이었고 독일에 거주하고 있었다. 해외본부에서 독일이 사무국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해외본부에서 그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는 저도 당시에 봤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새로운 통일운동체(새통체)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 프락치가 있다’는 거였다. 저는 그 편지를 보고 분개했고, 하태경 의원도 나중에 회고하면서 이 편지를 보고 분개했다고 하더라.

네 번째 편지가 문 목사가 1월 17일 밤부터 1월18일 아침까지, 돌아가신 날인데 그날 썼던 편지다. 이 편지는 세 지역본부 의장들에게 보내는 것이다. 북측본부 백인준 의장, 해외본부 윤이상 의장, 남측본부 강희남 준비위원장에게 썼던 것이다. 남측은 당시 준비위원회 체계였다.

그 편지에서도 마찬가지로, 새롭게 남한을 비롯해서 7천만 겨레가 통일의 주인이어야 되고, 범민련 틀로서는 7천만 겨레가 표출하는 통일의 열기를 담아내는데 한계가 있다. 이런 게 범민련의 한계라고 지적하면서 새로운 통일운동이 필요한데, 김영삼 정부 초기에 리인모 노인을 북으로 보낼 때 온겨레가 이를 환영했는데 이 환영 열기를 담아낼 틀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 답변해주시죠, 하는 게 문 목사 편지의 요지였다.

편지1,2 이후부터 국내에서 ‘문익환 목사는 프락치다’는 얘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어떤 경우에는 문 목사가 프락치다고 구체적으로 지목하는 경우도 있었다, 저도 기억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구체적으로 문 목사를 지목하지 않고, 새통체 흐름이 프락치에 의한 것이다고 하면서 교묘했던 것은 당시 전국연합 조통위원장이었던 조성우를 겨냥했던 게 많이 있었다.

‘조성우가 프락치다’는 얘기는 그로부터 1년 이상 지속됐다. 문 목사 본인이 ‘프락치다’고 얘기되는 거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공문 형태의 팩스로 유럽 범민련에서 온 것 보고 충격을 받으셨던 것이다.”

김 실장은 “하태경 의원은 늘 그러진 않았는데 ‘이게 백인준 명의다’고 주장했던 경우도 있다”며 “시간과 발송주체, 내용을 모두 뒤섞어서 북한의 백인준 의장이 ‘문익환은 프락치다’는 팩스를 보냈고 문 목사가 그것에 충격 받아서 쓰러졌다는 게 하태경 의원 주장”이라고 요약했다.

그리고 “프락치라는 내용이 포함된 팩스는 세 번째 유럽 범민련에서 온 것이고, 100% 백인준 (범민련 북측본부) 의장의 것이 아니다”며 “네 번의 편지가 오고간 게 팩트고 하태경 의원은 이 팩트를 명백히 뒤섞어버린 것”이라고 반박했다.

첫 번째 팩스가 공개된 이유에 대해 김 실장은 “저도 어떻게 공개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이 편지는 범민련 팩스를 통해서 문 목사에게 왔으니까, 문 목사에게 전달되기까지 중간에 수신처가 있었다”며 “수신처에서 이걸 공개한 이유는 문 목사의 새로운 통일운동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백 의장의 편지를 공개함으로써 문 목사에 대해 반박하기 위한 용도로 공개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김 실장은 그간 이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했다며, 백인준 범민련 북측본부 의장이 보내온 팩스를 근거로 내놓았다.  


 

 

 

   

▲ 백인준 의장의 서신 마지막 쪽. 통일운동에 관한 의견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정중한 어투로 일관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신고필’ 도장이 선명한 범민련 북측본부가 보내온 팩스는 백인준 의장이 자필로 작성한 9쪽에 달하는 편지이지만 어디에도 ‘프락치’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극진한 예를 갖추고 있다.

편지는 “재회의 그 기쁠 시각을 일일천추로 학수고대하면서 목사님께서 옥체건강하시며 조국통일 생업에 일익 헌신분투하여 주실 것을 절절히 기원하면서 놓기 아쉬운 붓을 이만 놓습니다”라고 맺고 있다.

가장 강한 주장을 내세운 대목마저 “제가 일말의 기우를 금할 수 없는 것은 남측 범민련 운동의 현상태와 장래입니다”라며 “범민련 운동 즉 조국통일운동이 결코 어느 한 지역운동의 성과로서만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며, 북과 남, 해외의 혼연일체의 연대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문 목사님께서 저보다 더 명철하게 확신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라는 정도의 정중한 톤으로 돼 있다.

김 실장은 “세 번째 범민련 유럽본부가 보내온 팩스는 아직 확보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중요한 대목은 기록해둔 게 있다”며 “‘새로운 통일운동체 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프락찌가 있다’는 내용이다”고 확인했다.

이른바 ‘새통체 프락치설’과 관련돼 당시 가장 주목을 받은 이는 다름 아닌 당시 전국연합 조국통일위원장이었던 조성우 민화협 공동의장이었다.

김 실장은 “운동진영 내에서 자기와 의견이 다른 경우에 그 사람을 프락치로 모는 경우가 1980년, 1990년대에 많이 있었다”며 조성우 의장의 경우 “정부기관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문익환 목사는 범민족대회에 김영삼 대통령을 초청하기 위해 초청장을 보냈고, 윤이상 선생도 정부 당국과 협의를 통해 귀국할 수 있도록 추진했고, 그 실무를 조성우 의장이 담당해 정부와의 접촉이 잦았다는 것이다.  


 

 

 

   

▲ 늦봄 문익환 목사의 마지막 유고가 된 범민련 북.해외.남측본부에 보내는 글.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김 실장의 증언과 자료들을 종합하면 범민련 북측본부와 해외본부 어느 곳에서도 문익환 목사를 ‘프락치’로 표현한 대목은 없고, 다만 범민련 해외본부가 ‘새로운 통일운동체 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프락찌가 있다’는 내용의 팩스를 보내온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성우 의장은 물론 문익환 목사까지 일부에서 프락치 혐의를 받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같은 당시 정황을 뒤섞어 하태경 의원이 “범민련 북측본부 백인준 의장 명의로 ‘문익환 목사는 안기부의 프락치’라는 팩스를 보냈고”라고 단정하는 발언을 언론에 쏟아내면서 자신의 전향을 합리화 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평소에 김대중-노무현 정권이라는 민주개혁정권을 거치면서도 문익환 목사에 대해서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다는 점에 안타깝고 죄스럽게 생각했다”며 “특히 제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문 목사의 통일론을 현대적으로 조명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문익환 목사의 삶과 죽음, 진실을 밝힌다 (하)>로 이어집니다.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문익환 목사의 삶과 죽음, 진실을 밝힌다 (하) 

 

김창수 통일맞이 정책실장, '문익환 통일론' 재조명

 

 

2012년 07월 10일 (화) 15:09:53 김치관.이광길 기자 ckkim@tongilnews.com

 

 

 

 

 

 

▲ 김창수 통일맞이 정책실장은 7일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문익환 목사의 '4.2공동성명' 등 통일론이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김창수 통일맞이 정책실장은 “하태경 의원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규명하는 이유는 문 목사의 생각을 정확히 말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왜 당시 문 목사가 논쟁의 한가운데 섰는가 말하겠다”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쉽게 말하면 문익환 목사가 왜 ‘프락치’로 몰렸는지 짚어보자는 것이다.

김 실장이 먼저 주목한 것은 1989년 문익환 목사가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접견하고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과 공동명의로 발표한 ‘4.2공동성명’이다.

“1989년도에 문 목사가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 주석과 몇 차례 토론하고 당시 허담 조평통 위원장과 4.2선언을 낸다. 4.2선언이 통일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현대적으로도 4.2선언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4.2선언에서 핵심적인 것은 세 가지다. 당시 쟁점이 됐던 것은 남북관계에서 정치.군사 문제가 우선인가, 교류협력이 우선인가? 북은 정치.군사 문제 우선이라고 하고 남은 교류협력 우선이다. 문 목사가 김 주석과 토론해서 ‘같이 할 수 있다’는 김 주석의 답변을 받는다. 이게 4.2선언에서는 정치.군사 문제와 교류.접촉을 같이 한다고 돼 있다.
 


 

 

 

 

 

 

▲ 문익환 목사는 1989년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만났다. [자료사진 - 통일맞이] 

 

 

그렇기 때문에 1991년도 9월에 열렸던 1차 남북고위급회담의 명칭이 ‘남북 사이의 정치.군사적 문제 해결과 교류협력을 위한 남북고위급회담’이다. 문 목사와 김 주석 사이에 합의돼서 허담과 4.2선언으로 발표된 게 남북고위급회담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남북기본합의서를 발표할 수 있었다.

두 번째가 통일방안에 대해서, 문 목사가 김 주석과 얘기하면서 ‘연방제를 천천히 할 수도 있다’는 합의를 해낸다. 4.2선언에서 연방제를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고 합의문에 표시하고, 1991년에 북한은 이것을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고 공식화한다. 당시 남측 정부 당국자들도 ‘북한이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연방제를 낮춘다면 긍정적이다’는 반응이 나왔다.

세 번째는 문 목사님이 남북(민간)이 합의한 것을 남북 당국에 건의한다, 당국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도 역시 지금 보면 중요한 이야기다.”


문익환 목사는 방북을 통해 남북 간의 통일논의를 한 단계 끌어올려 놓고,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노태우 대통령과 김대중, 김영삼 야당 총재에게 통일논의 4자회담을 제의했지만 감옥행을 면치 못했다.

병보석으로 잠깐 출소하기도 했지만 결국 93년 3월에서야 자유의 몸이 된 문 목사는 김일성 주석과 합의했던 내용들을 비로소 국민들에게 제시할 수 있게 된다.

“가장 중요한 점은 분출되는 국민들의 다양한 통일열기를 수렴할 수 있도록 폭넓게 통일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큰 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김영삼 정부와도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1993년 4회 범민족대회 추진본부장이었는데 김영삼 정부에도 초청장을 보낸다. 당연히 안 올 것은 알았지만.

당시 통일운동이 김영삼 정부에 대한 실망에서 반정부적 성격도 분명히 있었는데, 김영삼 정부와도 대화하자고 하고 범민족대회에 초청하자고 하고...
 



 

   

▲ 문익환 목사 석방 모습. [자료사진 - 통일맞이] 

 

   

▲ '문익환 선생 평양방문 보고 및 환영대회' 모습. [자료사진 - 통일맞이] 

 

 

문 목사는 국가연합에 대해서도 주장한다. 당시 재야 통일운동단체에서는 연방제안이 대세였는데 북한의 연방제안에 영향받은 것도 있었으나, 저도 통일운동단체에서 정책을 하고 있었는데 체제결합의 방식에서 통일을 하려면 연방제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가연합은 통일이 아니라며 대부분의 단체에서 연방제안을 주장하던 때다. 그런데 문 목사가 연방제가 아닌 국가연합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니 문 목사의 주장이 시대와 불화를 일으켰던 것은 사실이다.

문 목사는 당시 통일맞이 주장, 새로운 통일운동을 하자는 것이고, 범민련을 대체하는 새로운 통일운동체를 주장했다.”

당시 통일운동진영의 보편적 주장에서는 수용되기 쉽지 않은, ‘시대와 불화’를 일으킬만한 주장들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조직으로서 새로운 통일운동체(새통체)를 추진함으로써 문 목사는 첨예한 갈등의 중심에 섰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하태경 의원 주장대로라면 문 목사는 북한에서 프락치라고 몰리고 돌아가신 비운의 통일지사가 되지만, 과거 문 목사가 시대와의 불화 속에서 주장했던 것이 많은 부분 현실화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문 목사의 통일운동론을 정리하면, 당국 간 회의 하자는 것은 그 다음에 당국간 대화로 이어졌다. 6.15정상회담 이후에는 남북장관급회담, 당국대화가 활성화되면서 통일운동이 당국간 대화 활성화와 맥을 같이 하면서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되어간 측면이 있다. 문 목사의 주장이 시대를 앞서 갔으나 이후 기정사실화된 측면이 있다.

   
▲ 김창수 실장은 문 목사의 통일론이 오늘날에도 유의미하다고 강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문 목사가 주장한 통일방안에 관한 것은 북한의 통일방안의 수준을 낮췄던 측면이 분명히 있다. 문 목사 방북 이후 남한에서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노태우 대통령이 1989년 9월 국회연설에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만들어낸다. 이 방안의 핵심은 ‘남북연합’이라는 중간단계를 설정한 것이다.

문 목사가 남북을 오가며 북의 통일방안의 수위를 조절하고 남한에 영향을 미쳐서 남북연합이 만들어지는데 결국은 6.15선언 2항에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디딤돌이 된 것이다.

그래서 6.15선언이 만들어지고 이후 남한의 통일운동이 활성화됐던 것이다. 문 목사의 통일방안에 대한 논의는 남북 당국 사이의 합의를 만드는 바탕이 됐다.

문 목사는 당국의 역할을 인정하자고 얘기했다. 또 당국과 함께 민간이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민간이 통일을 준비할 수 있게 폭넓은 통일운동을 하자는, 그런 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지금 보면, 남북연합이라도 빨리 해내야 한다는 공감대가 통일운동 내에서 널리 퍼져있고, 또 다음 정권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해야 하고 여러 번 해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서는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을 해야 한다는 데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다.”

결국 이같은 문익환 목사의 시대를 앞선 혜안과 감옥을 마다 않는 헌신이 통일운동사에 중요한 디딤돌을 마련했지만 정작 문 목사가 추진했던 이른바 ‘새통체’인 민족회의도, 이에 맞섰던 범민련도 현재는 존재감이 미미한 상황이 됐다.

김 실장은 “민족회의 주장의 핵심은 남한의 통일운동의 대중화”라고 정리하고, 현재적 과제로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을 제안했다.

“범민련 주장의 핵심은 3자연대이고 민족회의 주장의 핵심은 남한의 통일운동의 대중화다. 둘 다 맞는 말인데 지금 시점, 6.15 이후에는 균형적으로 가야 하는 문제다.

당국 간에 6.15 정상선언을 했고 이후에는 3자연대와 남한 민간 통일운동의 대중화가 같이 가야 한다. 그런데 이게 제대로 안됐다.

그래서 범민련이나 민족회의나 현재 시점에서 존재감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범민련은 더더욱 불법화됐고 민족회의는 존재조차도 애매한 상황이 됐다.

왜? 돌이켜보자면 6.15선언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남북 공동행사에 참여했다. 이게 1차 범민족대회 열리던 1990년과 비슷하다.

당시 1차 범민족대회추진본부에는 유사 시민단체, 이익단체나 취미단체 비슷한 데도 참여했고 그걸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는데 6.15 이후에도 비슷했다고 본다.

저도 6.15선언 이후 통일운동 했던 사람으로서 반성적 성찰인데 운동성이 실종됐던 것 아닌가 생각한다. 문 목사 주장은 ‘민과 관이 함께 가야 된다’는 것이었는데, 관에 의해서 만들어진 통일공간에서 민의 운동성, 야성이 상실돼가는 과정이었다 생각한다. 당국과 대화를 통해서 만들어진 틀 속에 민의 운동이 안착돼가는 과정이었다.
 

 



 

 

 

 

▲ 재야의 거목, '늦봄' 문익환 목사. [자료사진 - 통일맞이] 

특히 6.15 이후 민간 통일운동이 두 가지 축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남북 간에 사회문화교류, 행사하고 교류하는 것. 또 하나는 대북인도적 지원. 통일운동이 두 축으로 되면서 운동성을 가지는 통일운동이 약화되고 실종되는 과정이었다.

남북 사회문화교류라는데 어찌보면 남북 민간연대 비슷한 것인데 정부로부터 주어진 틀 속에서 진행되면서 남한의 다양한 계층과 북한의 다양한 계층이 만나는 것을 증폭시키지 못하고 제한된 이벤트 행사로 가면서 남북연대도 성명서 교환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것은 시대적 한계도 있었으나, 통일운동이 대북지원과 사회문화교류 위주로 되면서 정치성, 운동성과 역동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게 활기 있게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6.15 이후에 민과 관 두 축이 확실히 서야 하는데, 관의 당국대화는 확실한 축으로 섰는데 민이 약화된 것은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차기 정권에서 제3차, 제4차 정상회담이 되면 마찬가지로 민간교류나 대북 인도적지원도 해야 하는데 이것 말고 남한 내에서 운동성과 대중성을 지니는 걸 해야 하는데 이게 바로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을 해야 한다고 본다.”

김 실장은 “문 목사 돌아가신 것도 이제 역사가 됐다”며 “문 목사 돌아가신 일도 팩트에 입각해서 봐야 하고 문 목사 삶과 죽음의 의미가 뭔가에 대해서 엄밀한 시각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문 목사 1주기 때 새통체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던 박순경 박사가 “문 목사 죽음은 통일운동의 분열에 대한 대속(代贖)적인 죽음”이라고 정의내린 데 대해 “그 원고를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고 밝혔다.

또한 문익환 목사가 1976년 명동성당 3.1구국선언으로 첫 감옥살이를 하면서 단식 중 지은 ‘마지막 시’를 그의 장남 호근(작고) 씨가 면회 후 필사본으로 남겨두었다며 ‘죽어야 산다고 그러셨지’라는 시구를 지목했다.

이 구절은 문 목사의 스승 김재준 목사가 성경구절을 “멋있게 번역”한 대목이었고, 문 목사는 이 시를 늘상 암송하곤 했다는 것.  


 

 

 

   

▲ 아들 호근 씨가 면회를 다녀와 기록한 문 목사의 옥중 시들. '마지막 시'도 여기에 포함돼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박순경 박사가 문 목사 1주기를 맞아 1995년 1월 18일 자필로 쓴 추모사. "문목사님은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을 생각하셨음에 틀림 없고..."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김 실장은 “박순경 박사가 문 목사의 죽음이 통일운동의 분열에 대한 대속적 죽음이라 하셨고, 문 목사의 시에 ‘죽어야 산다’는 구절을 보면서 박순경 박사의 말과 교차됐다”며 “문 목사는 늘 자신을 민주화운동의 제단에 바치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구나 생각 들었다”고 말했다.

김창수 통일맞이 실장이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 때 둘 모두의 스승이었던 문익환 목사의 삶과 죽음의 진실은 바로 문 목사가 생전에 늘 암송하던 ‘죽어야 산다’에 담겨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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