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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엔과 南北韓의 관계

한반도

by DemosJKlee 2014. 3. 11.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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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輯> 유엔 50차 총회와 한국
 | 기사입력 1995-09-27 15:11

(뉴욕=聯合) 李宇卓기자= "10년전만 해도 유엔안보리 이사국에 진출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정말 꿈만 같은데 당연하게만 느껴지는게 신기합니다"

 

금년도 제50차 유엔총회에서의 안보리이사국 진출을 사실상 확정지은 駐유엔대표부 趙源一차석대사는 유엔창립 반세기를 맞아 한국이 안보리의 핵심국가로 등장하게 된데 커다란 의미를 부여했다.

 

우리나라는 建國과정에서 부터 유엔과 뗄래야 뗄 수없는 인연을 맺어왔다. 유엔총회 결의 제1백12(Ⅱ) B호에 따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실시된 총선을 통해 지난 48년 8월15일 정부를 수립한 것.

 

대한민국은 그해 제3차 유엔총회에서 "한국민의 정당한 선거를 통해 수립된 유일한 합법정부"(결의 제1백95Ⅲ호)로 공인받았다. 북한은 뒤늦게 9월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유엔의 권능을 부인하고 나섰다.

 

유엔은 또 지난 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헌장에 규정된 `평화의 파괴및 침략행위'로 간주, 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소집해 "적대행위의 즉각중지와 북한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즉시 철수"를 요구했고 회원국들이 무력침공을 격퇴하기 위해 필요한 원조를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 83호를 채택, 유엔군을 파병했다.

 

3년여의 전쟁끝에 53년 체결된 정전협정도 유엔총회의 결의를 통해 효력을 인정받았다. 한국은 전쟁이 진행중이던 51년 11월 초대 駐유엔 상임옵서버 대표부를 둠으로써 유엔내에 거점을 두게 됐다.

 

한국문제는 이후 계속해서 유엔무대에서 단골 현안이 됐다. 특히 `아프리카의 해'였던 지난 60년부터 아프리카 신생독립국이 대거 유엔에 가입함으로써 미국중심의 유엔내 기존 세력판도가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비동맹운동 영향으로 다분히 反서방적 성향을 띠게 되자 한국문제 토의는 점점 더 복잡하게 됐다.

 

이로인해 한반도 통일이라는 본질적 문제토의 보다는 남북한 대표를 한국문제 토의에 참석시킬 것인가 하는 절차문제를 놓고 줄다리기가 벌어졌으며 결국 유엔은 68년 23차 총회를 통해 한국문제는 사무총장이 재량에 따라 상정토록 함으로써 한국문제 토의를 지양했다.

 

70년대 유엔은 우리에게 `괴로운 공간'이었다. 특히 사회주의 中國이 71년 대만을 축출하고 유엔대표권을 확보한데 이어 유엔내 비동맹 회원국의 비율이 40%선을 넘기에 이르렀다.

 

북한은 유엔무대를 적극 활용했다. 73년 5월 세계보건기구(WHO)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그해 7월 駐유엔 옵서버대표부를 설치한 북한은 유엔을 자신들의 주장을 알 리는 무대로 삼아 정전협정을 대체할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이나 駐韓美軍 철수등을 요구했다.

 

남북한의 유엔대결은 이에따라 소모전 양상으로 전개됐으며 한국은 유엔에서의 한국문제 논의에 `불상정.불토의' 원칙으로 대응했다.

 

지난 75년 제30차 총회를 기점으로 유엔에서의 남북한 대결은 진정됐다. 그 배겅에는 헨리 키신저 美국무장관의 중국방문등으로 미국과 중국간 관계개선이 이뤄진 것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76년 이후 우리는 유엔에서의 남북대결을 피하는 동시에 유엔가입을 적극 추진했다. 정부는 이에앞서 북한의 유엔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을 발표했다.

 

물론 우리는 정부수립 이듬해인 49년 유엔가입 신청서를 낸 이후 여러차례에 걸쳐 가입을 시도했지만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한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잘알고 있었다. 물론 사정은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유엔가입을 목표로 설정한 우리는 가입분위기 조성에 적극 나서 총회산하에 있던 7개 분과별 위원회 토의에 적극 참여하고 기여함으로써 사실상 유엔 회원국에 다름없는 유엔에서의 위상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유엔가입이 가시권내에 들어온 것은 80년대부터였다. 정부는 우리의 유엔 가입의 당위성을 회원국들에게 설득하는 외교적 노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국력신장을 배경으로 유엔의 각종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특히 지난 88년 제6공화국 출범이후 北方외교의 추진과 소련과 중국등 사회주의국가들이 대거 참가한 서울올림픽의 성공등으로 주변정세는 우리나라의 유엔가입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이어 북방외교의 결실로 89년 헝가리를 시발로 東歐 사회주의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됐고 마침내 소련과 90년 9월30일 국교를 맺었으며 곧이어 중국과 무역대표부 상호 교환설치에 합의했다.

 

다급해진 북한은 당시 진행중이던 남북 고위급회담의 3대 선결과제로 남북한 유엔 단일가입문제를 제기하는등 우리의 유엔단독가입에 빗장을 걸어두려 했다.

 

그러나 유엔가입을 외교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 정부의 의지를 북한이 막을 수는 없었다. 또 소련(이후 러시아)과 중국도 우리의 유엔가입을 사실상 수용할 수 밖에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따라 북한은 91년 5월27일자 외교부 성명을 통해 유엔가입을 신청할 것을 발표했고 7월8일 가입신청서를 사무총장에 제출했으며 우리는 그 다음달 8일 가입신청서를 제출했다.

 

결국 유엔 안보리는 8월8일 토론없이 만장일치로 남북한 유엔가입문제를 총회에 회부, 46차 총회 개막일인 9월17일에 남북한이 함께 유엔에 가입하게 됐다. 그로부터 4년만에 한국은 이제 안보리 이사국으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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