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과거 여당·다수당 예외없이 후폭풍에 휘말려 김형오 국회의장이 여야 미합의 시 주요 법안의 직권상정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여당의 법안 강행처리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에서조차 머뭇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과거 여당 또는 다수당의 안건 단독 강행 처리는 예외 없이 후폭풍을 몰고왔기 때문이다. 야당과 시민사회의 반발은 기본이고 당정 지도부 교체를 넘어 때로 정권의 몰락으로 직결됐다.
1958년 12월 집권 자유당은 국가보안법 통과를 위해 경호권을 요청, 법안을 단독으로 처리했다. 민심 이반이 급격히 진행되면서 60년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도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79년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 의원 제명안 처리를 위해 국회 경호권이 발동됐고, 여당인 공화당은 회의장을 옮겨 단독으로 김 총재 징계안을 의결했다. 이후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은 의원직 사퇴서를 내고 극한투쟁에 돌입했다. ‘부마 민주화 운동’ 등이 이어졌고 끝내 박정희 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86년에는 당시 통일민주당 유성환 의원이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대한민국 국시는 반공보다는 통일”이라고 한 발언을 문제삼아 여당인 민정당이 체포동의안을 가결시켰다. 이를 계기로 민주화 열기는 더욱 고조됐고, 이듬해 ‘6월 항쟁’으로 연결됐다.
이런 흐름은 경호권 발동의 희생자이자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룬 김영삼 정부에서도 재현됐다. 96년 말 여당인 신한국당이 복수노조 허용 등을 담은 노동법 개정안 등 20여개 법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면서 정권의 레임덕을 가속화했다. 노동계의 대대적인 파업을 초래했고, 민심이 급속히 등을 돌렸다. 여기에 한보사태로 인한 여야 정치인 구속, 차남인 김현철씨의 비리가 보태지면서 결국 신한국당의 후신인 한나라당은 97년 대선에서 패했다.
한나라당의 밀어붙이기는 야당 시절인 2004년 3월에도 연출됐다. 제1당인 한나라당이 민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킨 것이다. 하지만 두 야당은 촛불집회 등 국민적 저항에 부딪혔고, ‘탄핵 역풍’으로 그해 17대 총선에서 참패했고, 원내 1당 자리는 열린우리당이 차지했다.
2005년 12월9일에는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과의 몸싸움 끝에 사학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역풍에 시달렸다. 한나라당은 박근혜 당시 대표를 필두로 장외투쟁에 나섰고, 사학재단 등 종교계도 ‘날치기’라며 동참했다. 사학법은 2007년 결국 재개정됐다.
이처럼 경호권 발동이나 직권상정의 ‘끝’이 좋지 않다보니 한나라당 내 대권 주자들은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나 정몽준 최고의원 등이 경호권 발동과 관련해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이나 원희룡·남경필 등 중진 의원들이 지도부의 일방적 국회 운영을 비판하고 있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힘과 수적 우위를 앞세운 ‘날치기의 정치학’의 이면이다.
<김정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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